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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말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7장 1절~24절

by 성경큐티 2024. 9. 11.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말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7장 1절~24절에 대해 큐티하겠습니다.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말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7장 1절~24절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말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7장 1절~24절

 

 

 

요한복음 7장 1절~24절

 

1절 이 일이 있고 난 뒤, 예수께서는 갈릴리 지방을 두루 돌아다니셨다. 유대인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일부러 유대 지방을 피하신 것이다.

 

2절 그런데 유대인들의 축제인 초막절이 다가오자,

초막절(Sukkot)은 유월절(무교절), 칠칠절(오순절, 맥추절)과 함께 구약성경에 나오는 3대 절기 중 하나입니다. 가을 절기의 대표 절기이자 1년 중 마지막에 당하는 절기로 가을 농작물을 거두는 시기에 추수에 대한 감사의 의미도 담고 있는 절기입니다. 추수절, 장막절, 수장절, 구려절로도 불립니다.

 

3절 예수의 동생들이 와서, 예수께 말했다. “형님은 이곳을 떠나 유대로 가셔야 합니다. 그래야 형님의 제자들이 형님이 행하시는 기적들을 보게 될 것이 아닙니까?

철없는 동생들은 예수님을 기적을 행하는 자로만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계속 기적을 행하도록 권합니다.

 

4절 이런 데 숨어서 일하시면, 누가 형님을 알아보겠습니까? 어차피 이런 일을 할 바에는, 형님이 위대하시다는 사실을 세상에 증명해 보이란 말입니다.”

 

5절 예수의 동생들이 이런 말을 한 것은, 그들조차도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친동생들이 예수님에게 권합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큰 기적을 보여야 형이 누군지 알려야 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동생들은 예수님이 놀라운 기적을 베푸시는 분인지는 보고 알지만,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하지는 못했습니다. 동생들이 진정으로 그리스도라고 믿었다면 감히 어떻게 그리스도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친동생조차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세상의 자랑만을 위해 얘기합니다.

 

6절 그러자 예수께서 동생들에게 말씀하셨다. “안 된다. 지금은 내 때가 아니다. 너희들이야 때를 가릴 필요가 없겠지.

하지만 예수님은 때가 되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동생들은 때를 생각할 필요가 없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고민하고 생각해 봐야합니다. 예수님은 때가 있다고 하고 동생들은 때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얘기합니다. 이 둘은 뚜렷하게 대치되고 구분됩니다. 내 마음에 예수님이 계시면 때가 있는 것이고, 내 마음에 예수님이 없으시면 때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는 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에 예수님이 없으시면 내 마음대로 하면 되니까요.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가장 좋을 때를 찾아, 우리를 도우십니다. 이를 믿는 겁니다.

 

우리가 살면서 누구나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때가 되지 않으면 예수님은 뜻을 이루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는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을 통해서 모든 역사가 이뤄집니다.

 

여러분! 지금 주님께 기도해도 응답도 없고 답답하십니까? 혹시 여러분의 마음이 주님과 소통이 안 돼서 답답하십니까? 잠잠히 기도하고 때를 기다리세요. 때가 되면 이루시는 예수님을 믿고서요. 때가 되면 다 이뤄졌음을 나중에 도달하면 보게 될 겁니다.

 

7절 세상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나를 미워한다. 그것은, 그들이 악을 행하고 있다고 내가 증언하기 때문이다.

 

8절 너희는 명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가거라. 하지만 나는 이번 명절에는 올라가지 않겠다. 아직 내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9절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께서는 갈릴리 지방에 그대로 머무르셨다.

동생조차 보이는 것만 믿다 보니까. 이들도 유대인처럼 살아갑니다.

 

10절 예수의 동생들이 모두 명절을 지키러 올라가자, 예수께서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몰래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예수님도 명절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예루살렘으로 몰래 올라가십니다.

 

11절 명절 기간 동안,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를 잡아가려고 “누구 예수를 본 사람이 없느냐?” 고, 묻고 다녔다.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인 자신을 잡으려 다닌다는 것을 말입니다.

 

12절 예루살렘에 모여든 사람들은 예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수군거렸다. 어떤 이들은 예수를 훌륭한 분이라고 했고, 어떤 이들은 민중을 기만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구세주 예수님이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군중들은 둘로 갈립니다. 한 무리는 예수는 훌륭한 분이라고 하고, 한 무리는 민중을 기만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이들의 구분은 자기 뜻에 맞으면 훌륭한 분, 자기 뜻에 맞지 않으시면 기만한 자라고 구분했습니다. 이 둘의 구분은 인간적인 구분이며, 잘못된 구분입니다.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임을 아직도 깨닫지 못한 행위입니다.

 

13절 하지만 유대인 지도자들이 두려웠기 때문에, 아무도 예수에 대하여 드러내 놓고 말하지는 않았다.

유대인 지도자들이 두려운 이유는 뭘까요?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들었기에 그렇습니다. 이들은 두려우면서도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이유는 자신들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이권에 끼어들어 방해하는 예수님이 못마땅한 겁니다. 이들은 미련한 군중을 선동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옛 말 중 천심이 민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성의 마음이 하늘의 마음이라는 뜻인데요. 과거 성군들이 백성을 다스릴 때 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말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천심은 민심은 아닙니다. 백성들은 어리석습니다. 잘못된 선동을 따라 유혹하는 말에 너무 쉽게 빠져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들은 쉽게 죄악의 길로 따라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14절 명절 기간이 절반쯤 지났을 무렵, 예수께서는 성전 뜰에 들어가서 무리를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15절 유대인들은 예수의 말씀을 듣고, 크게 놀라워하며 말했다. “이 사람은 배운 적이 없는데도, 어떻게 저런 것들을 터득했을까?”

 

16절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의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에게서 온 것이오.

성전 뜰에서 무리를 가르치십니다. 유대인들이 놀랍니다. “이 사람이 배운 적이 없는데도, 어떻게 저런 것들을 알고 있느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배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과 도리, 율법을 직접 만드시는 분입니다. 배우는 사람이 아니고 만드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창조자입니다.

 

17절 당신들 가운데 누구든지 참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내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지, 아니면 내가 내 마음대로 말하는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오.

예수님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내 말이 하나님의 말인지 알 거다 “라고 하셨습니다.

 

18절 누구든지 자기의 생각대로 말하는 사람은 그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이오. 그러나 자기를 보내신 분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참된 사람이며, 그 사람에게는 거짓된 것이 없소.

 

19절 모세가 당신들에게 율법을 주지 않았소? 하지만 당신들 가운데 누구도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소. 당신들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고 하시오?”

유대인들은 율법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냥 율법 책을 문자로만 해석하고 인간적인 법과 규율을 만들어 정죄하는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이들의 마음에 사랑도 없고 율법의 정확한 의미도 모릅니다.

 

그리고 율법에 따르면 죄인의 죄를 판단하기 전에 증인들을 모아서, 먼저 재판을 한 후에 심판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이를 무시하고 바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결정합니다. 율법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알사탕 빼먹듯이 빼고 넣고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들 가운데 율법을 지키는 자가 하나도 없다. 어찌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라고 하십니다.

 

20절 그러자 사람들이 말했다. “당신은 분명 귀신 들렸소. 대체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한단 말이오?”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잘못이 들키자. 반대로 예수님께 모함합니다. “당신은 귀신 들렸소”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그 당시의 율법의 실상입니다. 율법이라는 울타리에서 유대인들의 아집과 권세가 만든 죄악입니다. 겉은 율법을 믿는 자처럼 보이나 이들의 마음에는 자신의 득과 실을 따지고 있는 권력자의 모습입니다. 이들은 오직 자신들의 이익만 따졌습니다. 오직 자신들의 지위와 평판만 따졌습니다.

 

21절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당신들은 내가 한 가지 기적만 행해도 모두가 놀라고 있소.

 

22절 그러나 당신들도 할례에 대한 모세의 율법에 따라 안식일에 할례를 베풀고 있지 않소? [사실, 할례에 대한 전통은 모세가 정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조상들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23절 이처럼 당신들의 자녀들이 안식일에 할례를 받는 것이 안식일에 관한 율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면,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몸을 고친다고 해서 당신들이 어찌 내게 분개하는 것이오?

 

24절 겉모양만 보고 판단하지 말고, 올바른 표준으로 공정한 판단을 하시오.”

이들은 예수님께 안식을 어겼다고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율법도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으로 율법을 만드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남을 정죄하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어리석은 자들을 향해 한탄하십니다.

 

그리고 모세의 할례를 말씀하십니다. 모세도 안식일에 자녀들에게 할례를 행했습니다. 이는 할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자녀가 되는 의식이 안식일보다 더 큰 은혜가 있다는 뜻입니다. 유대인의 기준으로 모세가 안식일을 어기지 않았다면, 예수님께서도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친 것을 두고 분개할 필요가 없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사시려는 분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려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는 자는 유대인처럼 해석하고 자신의 원하는 것을 행합니다. 성경 말씀을 문자로 해석하고 자기 뜻에 맞춰 해석합니다. 이런 자는 안 믿는 자보다 더 못한 삶을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면 세상 사람처럼 남에게 상처를 주고 살아갑니다. 특히 안 믿는 자들에게 상처를 줍니다. 안 믿는 사람은 믿는다는 사람을 보고 마음을 닫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반그리스도인이 자연스레 전환됩니다. 너무 안타까운 일들입니다. 예수님은 잃은 양의 비유로 한 명의 생명을 그리스도 이끄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반대로 한 명의 생명을 반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일들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 내 안에 그리스도가 없다는 것은 이런 무서운 행위를 하고 사는 당시의 바리새인이요. 서기관입니다.

 

“나는 먹고살고 힘든데 예수님만 바라볼 수 없습니다. 돈도 벌어야 하고 세상의 일도 집중해서 살아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려울 수로 예수님을 더 가까이해야 합니다. 절대로 멀리하시면 안 됩니다. 그래야 여러분이 사십니다. 여러분 마음의 중심에 예수님이 있어야 모든 사항을 분별하고 예수님의 지혜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원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자꾸 내가 원하는 일만 한다면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이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마음은 없고 머리만 있습니다. 유대인처럼 성경을 머리로 해석하고 판단하는 어리석은 일들을 행합니다. 결국, 내 안에 율법을 만들고 이를 기준으로 삼고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의 성공만을 위해 남은 희생시킵니다.

 

지금은 바꿔야 합니다. 나는 실패하더라도 주님이 성공해야 합니다. 이런 고백을 해야 진정으로 예수님이 내 안으로 오십니다. 이런 열매는 나 자신에게 너무 큰 은혜이며 이를 통해 나의 삶이 변화됩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따라가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말씀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소리를 들으세요. 정말로 힘들어서 하나님의 뜻을 지키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의 음성은 들으세요. 그리고 해보려고 흉내라도 내세요. 그래야 남을 용서도 할 수 있고 내 안에 있는 분을 이길 수도 있습니다. 내 안에 풍요로움을 느끼며 늘 감사하면 살 수도 있습니다. 그래야 내가 삽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숨 쉽니다. 내 안에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아갑니다.

 

짧은 이야기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처럼 보이는 옷을 선호한다고 합니다. 한 의류 분석가는 이를 확인하기 위해 실험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연한 갈색 잠바를 입고 지하철역에 나가서 지갑을 놓고 왔다고 하며 차비를 구걸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정중하게 차비를 주었습니다. 다음에는 어두운색의 바바리를 입고 같은 방법으로 차비를 구걸했더니, 사람들은 마치 위협을 느끼는 듯 냉담하게 반응했습니다. 이 실험은 사람들이 외모만 보고 사람을 평가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오늘 내가 가식적인 행위를 하지 않았는지?, 또 남을 정죄하지 않았는지? 생각하고 주님께 진정으로 회개하면 나아가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붙잡고 진정으로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따라가겠습니다. 이 길이 나의 길이며, 그 길을 따르겠습니다”라고 고백하면 하루를 살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