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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나의 진정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1장 1절~44절

by 성경큐티 2024. 10. 29.

나의 진정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1장 1절~44절에 대해 QT 하겠습니다.

 

나의 진정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1장 1절~44절
나의 진정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1장 1절~44절

 

 

말씀을 깊이 묵상하다 보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친밀감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가 가장 소중한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친밀감입니다. 사회 활동 중에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때로는 같은 취미로 모임을 이어가며 서로를 더 알아가고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이러한 관계가 발전하면서 서로 좋은 음식이나 물건을 나누고, 서로의 애경사를 챙기며 아픔을 공감하기도 합니다.

 

친밀감은 아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믿는 여러분께 제안합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매일 말씀을 읽고 큐티와 기도를 하세요. 그렇게 해야 주님을 더 알고 친밀한 관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말씀을 멀리하는 것은 주님과의 관계를 스스로 멀어지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바쁘더라도 짧은 말씀과 기도를 빼먹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친밀감은 헌신이 필요합니다. 자녀를 생각해 보면 그 점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자녀를 키우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대부분 부모가 공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힘든 시간은 부모와 자녀가 인격적으로 만나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서로를 알아가는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시간은 어렵지만, 매우 귀한 시간입니다.


친밀감이 깊어지면 서로의 믿음도 커지게 됩니다. 이 믿음은 신뢰감을 두텁게 만듭니다. 자녀와 관계가 안 좋은 분은 함께하는 시간이 적어서 그렇습니다. 반성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시간이 없다고 핑계를 대시는 분도 계시는데요. 오늘부터 자신의 모든 시간을 점검해 보세요. 내가 불필요하게 쓰는 시간이 없는지 말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꼭 만드세요. 그래야 내 영혼이 삽니다. 내 영혼도 불쌍하잖아요. 지켜야 하잖아요. 그래야 내 믿음도 한 걸음씩 성장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큐티를 통해 만나는 주님이 정말로 좋습니다. 주님이 내게 가장 소중한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전에는 습관적으로 관계를 맺었다면, 이번 큐티를 통해 저는 주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께도 매일 큐티와 기도를 강력히 추천해 드립니다.

 

요한복음 11장 1절~44절

오늘 말씀은 기적이 중요 포인트가 아닙니다. 오늘 말씀은 믿음이 포인트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뿐만 아니라 믿는 우리도 진정한 믿음이 있는지 점검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자신의 신앙심을 한번 확인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1절 ‘나사로’라고 하는 사람이 큰 병이 들었다. 그는 마리아와 그의 자매 마르다가 사는 베다니 마을 사람이었다.

 

2절 예수께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씻어 주었던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가 병이 든 것이다.
마리아는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드렸습니다. 그녀는 아낌없이 모든 것을 드릴 만큼 예수님을 따르는 가정의 일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의 오빠인 나사로가 중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3절 두 자매는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전하기를 “주님, 주님이 아끼는 사람이 병이 들었습니다.” 하였다.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가장 아끼는 사람들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빠를 깊이 사랑하는 자매로, 베다니 마을에서도 형제자매 간의 우애가 남다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빠가 중병에 걸리자 마르다와 마리아는 주님께 사람을 보내고, 그 후에도 정성을 다해 나사로를 간호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 사람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즉시 오시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절박한 상황에 부닥쳐 있는데 말입니다.

 

4절 이 말을 전해 듣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의 병은 죽을병이 아니오. 오히려 그의 병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고, 또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오.”

 

5절 예수께서는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 그리고 나사로를 사랑하셨다.

 

6절 그러나 그들에게로 즉시 가시지 않고, 계시던 곳에 이틀이나 그대로 더 머무르셨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죽음을 통보받은 장소는 예루살렘을 떠나 요단강 가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즉시 베다니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

 

예수님이 즉시 오셔서 나사로를 살려주셨다면 좋았을 텐데, 이틀 후에 오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통보를 받았을 때 이미 나사로는 죽은 상태였을 것입니다. 요단강 가에서 베다니까지는 보통사람이 걸어서 하루가 걸리는 거리입니다. 예수님이 이틀을 머무신 후 베다니에 도착했을 때, 나사로는 이미 죽은 지 나흘이 지난 상태였습니다. 날짜를 계산해보면,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준 사람이 요단강가에 오기까지 하루가 걸렸고, 예수님이 요단강가에 머문 시간은 이틀, 그리고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까지 가는 데 하루가 걸립니다. 이를 모두 더하면 총 4일이 됩니다.

 

7절 그런 후에 제자들에게 “자, 다시 유대 지방으로 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8절 제자들이 예수께 말했다. “선생님, 유대인들이 선생님을 죽이려고 한 것이 바로 며칠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다시 그곳으로 가려고 하십니까?”
제자들도 나사로의 중병에 대한 소식을 들었지만, 예수님이 가시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곳에 안 가신다는 것에 대해 안도의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자고 하시자 이상하게 느껴져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구절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명과 그가 수행해야 할 일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걱정을 알고 계시지만,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감수해야 할 위험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다.

 

이는 인간이 보는 현상과 하나님의 계획이 충돌하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보는 그림은 매우 제한적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을 기준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세상은 무궁무진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깊고 넓기에 우리는 그 한계 속에서 하나의 점으로 존재하는 겁니다.

 

9절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낮은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사람이 낮에 걸어 다니면, 세상을 비추는 빛 때문에 걸려서 넘어지지 않는다.

 

10절 하지만 밤에 걸어 다니면, 빛이 없기 때문에 걸려서 넘어지기 쉽다.”
이 구절에서 "낮"과 "밤"은 각각 빛과 어둠을 상징합니다. 낮은 빛이 있는 상태를 의미하며, 이는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라는 사실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낮에 걸어 다니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와 진리가 함께하는 삶을 상징하며, 빛이 존재하는 동안에는 안전하게 걸어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반면, 밤은 빛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며, 이는 혼란과 위험을 상징합니다. 밤에 걸어 다니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나 진리가 모자란 삶을 나타내며, 이 경우 넘어질 위험이 크다는 경고가 담겨 있습니다. 결국, 이 말씀은 신앙의 중요성과 하나님의 빛 아래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빛이 있는 낮에 살아갈 때, 올바른 길을 찾고 넘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11절 이 말씀을 하신 뒤에, 예수께서 이어 말씀하셨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이 들었다. 자, 이제 내가 가서, 그를 깨워야겠다.”

 

12절 제자들이 예수께 말했다. “주님, 그가 잠들었다면 낫게 될 것입니다.”
또 인간적인 생각으로 말합니다. “잠이 들었으니 깨면 낫는다”고 말합니다.

 

13절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죽었다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이었지만, 제자들은 그가 단순한 잠이 들어 누워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14절 그래서 예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나사로는 죽었다!

 

15절 하지만 내가 거기에 있지 않았던 것이 너희를 위해 아주 잘된 일이다. 그래야 너희가 믿을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 이제 그에게로 가자.”
이 말씀을 보면 마치 나사로의 죽음이 잘 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너희가 믿을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의 죽음과 제자들의 믿음은 겉보기엔 다른 것처럼 보이는데, 왜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 “제자들이 믿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제자들이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걸까요?

 

사실 제자들은 자신의 생업을 모두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생업은 그들의 전부입니다. 전부를 포기하고 따르는 것이니, 이보다 더 큰 믿음이 어디 있을까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믿음은 어떤 의미의 믿음일까요?
우리는 믿는 자들입니다. 주일 예배뿐만 아니라 상황에 따라 새벽기도, 수요일, 금요일에도 교회에 나갑니다. 또한, 적절한 시기에 감사 헌금과 십일조를 드리고, 간간이 말씀을 읽고 기도하며, 교회 안에서 성도들과 좋은 교제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도를 보면 믿음이 좋다고 여겨지지 않나요?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에 대해 죽음을 통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당시 이미 나사로는 죽은 상태였지만, 예수님은 “죽음은 끝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으셨습니다. 우리는 천국을 소망하지만, 누구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두려움에서 벗어나, 이제는 죽음 이후의 영생을 바라보는 믿음을 가질 것을 말씀하십니다. 죽음이 끝이 아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과 함께, 예수님이 앞으로 죽으실 때에도 망연자실하지 말고 영생이 있음을 깨닫고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사로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알리는 제자들에게 주는 메시지와 같았습니다.

 

16절 그때 ‘디두모’라는 별명을 가진 도마가 다른 동료 제자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갑시다.”
도마는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유다로 가기로 했을 때 다른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디두모"라는 별명은 그가 쌍둥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도마의 발언은 예수님과 함께 가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와 함께 죽겠다는 결단을 보여줍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곳에 기꺼이 동행하며 충성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17절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에 도착해서 보니, 나사로가 이미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나 되었다.
예수님의 관심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데만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나흘이나 지체하셨을까요? 이미 미리 오셔서 살리실 수 있었음에도, 시신이 썩어 냄새가 나는 상황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예수님은 자기 죽음을 미리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또한,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제자들과 이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분명히 알리고 싶으셨습니다. 인간이 가장 소망하는 영생에 대해 말씀하시고, 이곳에 모인 이들이 그 증인이 되어 나중에 예수님의 부활을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

 

18절 베다니 마을은 예루살렘에서 대략 오리가 조금 넘는 가까운 곳인데,

 

19절 많은 유대인들이 문상을 와서,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하고 있었다.

 

20절 예수께서 오신다는 기별을 듣고, 마르다가 마중을 나왔다. 마리아는 집에 있었다.

 

21절 마르다가 예수께 말했다.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믿음을 살펴보면, 마르다는 예수님께 “예수님이 계셨다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죽어가는 자를 살리시는 것을 알고 있지만, 죽은 자를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은 부족합니다. 오히려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조차 못 합니다. 이로 인해 마르다는 현재 상황만 바라보며 자신을 제한하게 됩니다. 그녀의 믿음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단지 눈에 보이는 사실만을 인정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보지 않더라도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리스도임을 믿는 것이며, 단순히 보고 들은 사실의 능력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나의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실상은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22절 그러나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이제라도 주님이 구하시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 주실 줄 압니다.”
마르다는 24절에 말한 부활의 때를 말합니다.

 

23절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마르다야, 네 오빠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네 오빠가 다시 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24절 마르다가 예수께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할 때, 제 오빠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사실은 저도 압니다.”
예수님께서 “네 오빠는 다시 산다.”라고 말씀하실 때, 마르다는 “네, 알겠습니다. 믿습니다”라고 응답해야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고 마지막 날의 부활에 대해 “제 오빠가 다시 살아날 것을 압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마르다는 마지막 날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가지고 있지만, 현재 당장 그를 살리실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예 모릅니다.

 

25절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죽지 않고 살 것이다.

 

26절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예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죽지 않고 살 것이며,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핵심적인 단어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영생에 대한 믿음을 묻고 계십니다.

 

27 마르다가 예수께 대답했다. “예, 주님, 저는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습니다.”
마르다는 정말 100점짜리 흠잡을 수 없는 신앙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 고백이 옆에 계신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고백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 당시 예수님이 계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미련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예수님은 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하지만, 과연 정말로 우리의 삶에 예수님이 함께하고 계시는가요?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습관적으로 하는 고백이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성경에 쓰여 있으니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은 고백은 아닌지, 주변 성도들의 눈치를 보고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닌지 점검을 해야 합니다. 겉으로는 믿는 자처럼 보이지만, 과연 내면이 진정한 믿음을 가졌는지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28절 마르다는 이 말을 마치고 돌아가, 동생 마리아를 불러 말했다. “주님이 오셔서, 너를 찾고 계신다.”

 

29절 마리아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께 갔다.

 

30절 예수께서는 아직 마을로 들어가지 않으시고, 마르다가 마중 나왔던 곳에 그대로 머물러 계셨다.

 

31 집에서 마리아를 위로하고 있던 유대인들은, 마리아가 급히 나가는 것을 보고는, 그녀가 울기 위해 오빠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는 줄 알고 함께 따라나섰다.

 

32절 마리아는 예수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러 그분을 보고는,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말했다. “주님, 주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미라아 또한 마르다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계시면 나사로 오빠가 죽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33절 예수께서는 마리아가 우는 것과, 또 함께 따라온 유대인들도 우는 것을 보시고는, 심히 마음 아파하셨다.

 

34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나사로를 어디에 두었소?” 그들이 대답했다. “주님, 와서 보십시오.”

 

35절 그때, 예수께서는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예수님은 왜 우셨을까요? 나사로의 죽음에 슬퍼하신 걸까요? 물론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나사로의 가족을 깊이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사로를 살리실 것에 대한 확답을 받으신 상태였기에, 그의 죽음 때문에 울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눈물을 흘리셨을까요?

 

그 이유는 안타까움 때문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이곳에 모인 사람들을 보며 그들의 아픔과 슬픔이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죽음만 바라보며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이, 곁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조금 후면 예수님도 이들 곁을 떠나실 것입니다. 그때도 이들은 다시 살아나실 거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들의 모습을 생각하고 그려보니 예수님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이 현재 살아계심을 믿는 사람은 모든 환경과 조건을 초월하여 주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현재 나에게 계신 주님만을 바라보는 믿음을 더 원하십니다.

 

여러분도 시련이나 아픔이 닥칠 때 누굴 바라보나요? 현실만 바라보고 아파하고 있지는 않나요? 우리도 육체를 가진 인간이기에 대부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잠시 시련과 아픔을 내려놓고 주님께 기도하세요.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지는 주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 그 문제에만 몰두하고 아파하지 마세요.

 

36절 그러자 유대인들이 수군거렸다. “저것 좀 보시오. 저분이 나사로를 무척 아끼고 사랑했던 모양이오.”

 

37절 그러나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빈정거렸다. “맹인의 눈도 뜨게 한다는 사람이 나사로를 죽지 않게 하실 수는 없었던 말인가?”
우리도 종종 남을 빈정거리며 말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습관은 정말 나쁜 것입니다. 부정적인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남의 사연과 배경을 충분히 이해하지 않고 내뱉는 말은 받는 이에게 더욱 해롭습니다. 믿는 우리는 결코 이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38절 예수께서는 침통한 마음으로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셨다. 동굴로 된 무덤은 입구가 큰 돌로 막혀 있었다.

 

39절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저 돌을 치우시오.” 그러자 죽은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가 말했다. “하지만 주님, 오빠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으니, 지금쯤 냄새가 날 겁니다.”
예수님께서 “저 돌을 치우라”라고 명령하시지만, 그 명령을 저지하는 이는 바로 마르다입니다. 그녀는 영생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지만, 바로 눈앞에 계신 분이 모든 권능을 가지신 분임을, 그리고 죽은 자도 살리실 수 있다는 믿음은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있지만, 마음속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 두 가지 유형의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한쪽은 주님께 고백하며 기도를 하러 갈 것이고, 다른 한쪽은 스스로 해결하려고 발버둥을 칠 것입니다. 후자의 사람도 믿음이 있는 자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40절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마르다야,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내가 네게 말하지 않았느냐?”
마르다는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는 것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분명 다른 차원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잘 알고 있지만, 과연 얼마나 마음으로 깊이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나요? 여전히 자신의 고집과 제한된 지식에 의존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41절 마침내 사람들이 무덤을 막은 돌을 옆으로 굴려 놓자,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제 말을 들어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나사로를 살리신 것에 대해 하나님의 응답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감사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아버지, 제 말을 들어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라고 하십니다.

 

42절 언제나 제 말을 들어주시는 아버지께 새삼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여기서 있는 사람들이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제가 아버지께 다시 이렇게 고백하는 이유는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주된 목표는 나사로를 살리는 기적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죽음도 이기시는 믿음을 주시기 위해 이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여기 모인 이들의 부활의 믿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일들을 세 번 행 하셨습니다. 딱 세 번입니다.

 

1. 야이로의 딸, 2. 나인성 과부의 아들, 3. 나사로입니다.

 

예수님은 생전에 딱 세 번만 하셨습니다. 이유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이 땅에 표적을 보이시는 것은 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심어주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43절 그러고 나서, 예수께서는 큰 소리로 부르셨다. “나사로야, 이리 나오너라!”

 

44절 그러자 죽었던 나사로가 무덤 밖으로 나왔다! 그의 손발은 베에 감겨 있었고, 얼굴은 천으로 싸매져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싸맨 것들을 풀어주어, 나사로가 자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게 하시오.”
우리 인간은 보이는 육체의 괴로움을 갖고 슬퍼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영혼이 아픔을 슬퍼하십니다. 몸은 썩어 사라지지만 영혼은 영원하여서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14:27 나는 너희 마음에 평안을 남기고 간다.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전혀 다르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주님이 우리 안에서 말씀하십니다. 마르다는 깊은 진심의 믿음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죽음도 이길 수 있는 믿음까지 없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을 수 있을까요?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 때, 주님을 바라볼 수 있을까요? 이러한 믿음이 내 안에 있는지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지식으로 아는 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이 믿음은 우리의 지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마음속에 계신 주님을 믿는 고백입니다.

 

아무리 큰 고비와 아픔도 주님 안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큰 문제가 발생할 때 자연스럽게 당황하거나 두려움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 순간이, 우리에게 믿음을 점검할 기회입니다. 문제만 바라보고 세상이 끝난 것처럼 느끼는 사람은 믿음이 약하거나 부족합니다. 그러나 모든 문제는 주님의 뜻 안에 있습니다. 주님을 붙잡고 기도하는 사람은 살아 계신 주님에 대한 믿음이 굳건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연약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시도에는 한계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더욱 주님께 다가가 해결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짧은 이야기 1

[사도행전 7장 52절~60절]
52절 여러분의 조상들이 박해하지 않은 예언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었습니까? 여러분의 조상들은 장차 의로우신 분이 오실 것이라고 예언한 자들을 죽였지만, 이제 여러분은 이 땅에 오신 바로 그 의로우신 분을 배반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53절 여러분은 천사들이 전하여 준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으면서도, 그것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54절 스데반의 말을 듣고, 공회 사람들은 화가 치밀어 올라, 스데반을 보며 이를 갈았다.
55절 그러나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보니, 하나님의 크신 영광이 보이고, 또한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모습이 보였다.
56절 그런 광경을 보고, 스데반이 크게 소리쳐 말했다. “보시오! 저기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십니다!”
57절 그러자 사람들은 손으로 귀를 틀어막으면서 목청껏 소리를 지르더니, 일제히 스데반을 향해 달려들었다.
58절 그런 후, 그들은 스데반을 붙잡아 성 밖으로 끌어내더니 돌로 치기 시작했다. 그때 스데반을 고소했던 거짓 증인들은 겉옷을 벗어서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놓았다.
59절 돌들이 날아오는 가운데서, 스데반은 기도했다. “주 예수님, 제 영혼을 받아 주소서.”
60절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소서.” 이 말을 남기고, 스데반은 고이 잠들었다.

죽음을 초월하는 믿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부활한 예수님을 믿던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지만, 그의 얼굴은 천사와 같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해친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죽음을 초월하게 됩니다. 스데반은 죽음보다 예수님이 더 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의 어려움, 아픔, 시련, 고통이 힘든 상황 속에서도, 죽음을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이런 생각조차 힘들겁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 모든 것을 감당하게 하시는 분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이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 그리고 믿음의 역사를 이룬 사람들도 모두 예수님을 바라보며 죽음을 감당했습니다. 우리의 어리석은 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에 예수님이 오시면 이런 역사의 믿음이 생깁니다. 이런 믿음은 우리가 스스로 노력해서 갖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을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 점을 잘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짧은 이야기 2

2021년 10월, 저는 지방의 주상복합 아파트 건축 허가를 받기 위해 시청과 구청을 오가고 있었습니다. 건축 허가 심의가 거의 마무리될 무렵, 구청 도로과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들은 아파트 앞 도로의 폭이 부족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즉시 지방으로 내려가 확인해 보니, 일반적인 도로는 보도통로와 갓길(배수로 및 여유 공간), 차도로 구성되며, 2차선 도로는 최소 6m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현황상 차도 폭은 5.5m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건축설계사와 함께 지방으로 내려가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이곳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므로, 안전을 위해 시속 30km로 제한하면 5.5m의 차도 폭도 문제없다고 도로법에 명시되어 있습니다."라고 해명했지만, 도로과 공무원은 저를 쳐다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이곳에서 시속 30km로 가는 곳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저는 도로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담당자는 자신의 견해를 고수했습니다.

미팅이 끝난 후 회사에 돌아와 고민하며 백지에 수도 없이 도로 폭을 그려보았지만, 제한된 공간에서 도로 폭을 넓히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렇게 인간적인 방법으로 고민하고 있을 때, 건축설계사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라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갓길(배수로 및 여유 공간)을 보도 아래로 넣는 특수공법을 사용하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비용은 조금 더 들더라도 문제없다고 했습니다. 서울에도 이 공법이 적용된 사례가 있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다음 날, 설계사와 함께 지방으로 내려갔습니다. 설계사는 공무원에게 자세히 설명하고 사례도 들어가며 설득을 시도했지만, 공무원은 여전히 “안 됩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이유는 이 지방에서 이 방법이 사용된 적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공무원과의 대면에 실망감을 느끼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내는 저의 초라한 모습을 보며, “당신 믿는 사람 맞아! 고민만 하지 말고 기도해”라고 권고했습니다. 속으로는 “이게 기도로 해결될 일이 아닐 텐데…도로설계와 공법으로 풀어야 하는 문제인데…….”라고 생각했지만, 아내의 말에 따라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이 사업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죠? 저는 부족하지만, 주님이 꼭 도와주세요. 저는 이제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해도 풀 수 없습니다…….” 기도를 마친 후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다음 날, 다시 설계사와 함께 해결책 없이 지방 구청으로 갔습니다. 그때 담당자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그의 상사인 과장이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다가와서 과장이 이렇게 조언했습니다. “도로 폭이 좁으니, 보도를 만들지 마세요. 보도와 도로가 공존하면 되잖아요. 그렇게 하면 자연스럽게 해결됩니다. 먼저 허가를 받기 위해 경찰청 도로과에 가서 이렇게 설명하세요.”
과장의 말대로 하니까. 정말 문제였던 것이 다 풀려, 결국 허가를 받았고, 현재 건축이 진행 중입니다. 부족한 저를 도와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저의 지식이 아닌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풀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누구나 언젠간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그럴 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이 여러분(마르다)에게 말씀하십니다.
40절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의 사랑하는 자녀야(마르다야),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내가 네게 말하지 않았느냐?” 이 말씀을 기억하면 살아야 합니다. 마르다처럼 말로만 고백하지 마시고요! 나의 환경이 어려울 수로 주님을 더 똑바로 바라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수학의 원리, 공법의 원리, 대화의 기법으로 세상을 이겨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사탄에게 이런 원리로 맞서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힘으로 이겨내야 합니다. 이게 정답입니다. 그래야 바른길로 갈 수 있습니다.

 

나의 진정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