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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겠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2절~42절

by 성경큐티 2024. 10. 21.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겠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2절~42절에 대해 QT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겠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2절~42절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겠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2절~42절

 

 

요한복음 10장 22절~42절

 

22절 때는 겨울이었고,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다가왔다.

수전절(한카)은 유대교의 명절 중 하나로, 주로 겨울철에 기념됩니다. 수전절은 기원전 2세기경, 마카비 혁명 이후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과 성전 봉헌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 명절은 일반적으로 8일 동안 지속하며, 주로 유대력으로 키슬레브 월의 25일부터 시작됩니다.

 

23절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행각을 거닐고 계실 때,

솔로몬 행각(Solomon's Porch)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의 일부로,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에서 언급됩니다. 이 행각은 솔로몬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성전의 동쪽에 있었습니다.

 

24절 유대인들이 예수를 둘러싸고 물었다. “당신은 얼마나 더 우리 속을 뒤집어 놓을 작정이오?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우리에게 분명히 말해 주시오.”

예수님은 그전에도 예수그리스도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유대인은 계속 예수님께 묻고 또 묻습니다. 이들의 이런 행동은 이미 마음을 닫아서 그렇습니다. 자신의 답이 안 나와서 그렇습니다.

 

믿는 우리도 한 번 점검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경 말씀으로 또는 각자의 은혜로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내 마음에 주님이 계시나요?

마태복음 28장 20절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이 말씀이 내게 믿어지나요? 우리도 혹시 유대인처럼 “주님. 정말 우리와 함께 계십니까”라고 질문을 계속하지 않으시나요?

우리는 내 마음에 계신 예수님이 느껴지지 않아서 매번 멀리서 주님을 찾습니다.

 

25절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이미 당신들에게 여러 번 말했는데도, 내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이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기적들이 내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말해주고 있지 않소?

 

26절 당신들이 나를 믿지 않는 것은, 당신들은 내 양들이 아니기 때문이오.

 

27절 내 양들은 내 음성을 알아듣소. 나는 내 양들을 잘 알고, 내 양들 또한 나를 따른다오.

예수님을 믿는 유일한 증거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거나 따르지 않으면 유대인처럼 내 양이 아니라고 부인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분명한 사실이니 마음에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 더 알 것은, 27절 ”내 음성을 알아듣는 양들을 내가 잘 알고, 또한 내 양들도 나를 따른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으려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따라야 합니다.

“따라야!”

예수님의 말씀이 들립니다. 알기만 하고 따르지 않으면 말씀이 안 드립니다. 순종하는 마음이 있어야 예수님의 말씀이 내게 들린다는 사실입니다. “나에게 왜 말씀이 안 들릴까”하는 부분은 “내 마음에 예수님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가”부터 먼저 고민해야 합니다. 먼저 "따르다" 마음의 결단이 있어야 내 영혼에 말씀이 들립니다. 이런 결단이 없으면 말씀이 내 귀에서 그냥 흘러갑니다. 나와 상관 없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28절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터인데, 그러면 그들은 절대 멸망하지 않을 것이오. 어느 누구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한다오.

 

29절 그들을 내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그 무엇보다도 크고 위대하신 분이라오. 그러므로 온 세상의 그 누구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한다오.

 

30절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요.”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얻은 자는 그 누구도 영혼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31절 그 말을 듣고, 유대인들은 다시 돌을 집어 들어 예수를 치려고 했다.

유대인의 반복된 질문에 예수님은 진리의 같은 답을 말하는데, 이들은 계속 못 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똑같은 질문을 계속하며 자신이 이미 정한 바를 확인하려고 합니다. 이런 자에게는 답이 없습니다. 이미 자신이 답을 갖고 있으면서 상대를 그 방향으로 몰고 가려고 합니다. 자신이 이미 정해진 답과 맞추기 위해, 예수님을 죽이려고 계속 같은 질문을 반복합니다. 이상하지 않으세요. 이들은 작은 꼬투리라도 잡아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악함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자신의 뜻한 바가 이뤄지지 않자,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아십니다. 이들은 나의 양이 아님을 아십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하나입니다. 결국, 이들은 자신이 믿고 따르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가 되고 맙니다.

 

32절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께로부터 권능을 받아 많은 기적들을 당신들에게 보여주었소. 그런 이유로, 당신들이 나를 돌로 치려 하는 것이오?”

 

33절 그들이 대답했다. “그런 것 때문이 아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모독했기 때문이다. 당신은 일개 사람에 불과하면서 스스로를 하나님이라고 주장하고 있지 않느냐?”

유대인들은 표적은 인정하지만, 이들에게는 이 표적들이 단순히 놀라운 사실로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표적을 보면서 우리는 많은 고민을 해야 합니다. 단순히 놀라운 사실과 흥분된 사실에 집중하기보다는 이 사실이 어디서부터 온 사실인지 깊게 묵상해야 합니다. 특히 믿는 분들은 그래야 합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다 보면 우리 주변에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대부분 그때 우리는 우연이라는 단어를 쓰고 그냥 넘어갑니다. 현실을 우연이라는 단어로 넘깁니다.

 

하지만 이런 자에게는 영혼이 없습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우연이 없습니다. 이유와 원인으로 만들어진 사실들입니다. 그래서 믿는 우리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실을 보면 예수님이 내게 주신 이유를 깊게 묵상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내 안에서 함께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내게 주신 이유와 원인이 이기에 그렇습니다. 나의 모든 일상이 우연은 없습니다. 내게 주신 이유와 원인을 깨닫는 자는 예수님과 동행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일상에 예수님과 함께 동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세상의 자만과 교만에 빠지지 않습니다. 내가 잘나서 된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된 것들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나의 고난과 시련도 은혜요. 사랑과 축복도 은혜가 됩니다. 모든 것이 주님 안에서 은혜가 됩니다.

 

34절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당신들의 율법에도 기록되어 있기를 ‘내가 너희를 신들이라고 하였다.’ 하고 되어 있지 않소?

 

35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신들’이라고 하였으니, 성경 말씀이 틀릴 리가 없소.

 

36절 그렇다면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여 따로 이 세상에 보내신 이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했다고 해서, 당신들이 나를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로 몰아 부치는 것이오?

 

37절 내가 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행하지 않는다면, 당신들은 나를 믿지 마시오.

 

38절 그러나 내가 그분의 일을 행한다면, 설령 나는 믿지 못하더라도 내가 행하는 기적은 믿으시오.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당신들이 깨달아 알게 될 것이오.”

예수님은 너무 답답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않으면 믿지 말라. 내가 행한 기적을 믿어라. 그러면 너희는 깨달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어라 ~ 깨달아진다.” 믿지 못하면 깨닫지도 못합니다. 먼저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소중한 겁니다. 믿지 않고는 깨달아지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도 깨달아지지 않아 계속 반복된 질문만 합니다.

 

여기서 표적이 이들에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표적은 표적이고 이들의 근본적인 마음이 이미 사악합니다. 사악한 마음은 믿음을 거부합니다. 믿음은 순종을 말하지만 사악한 마음은 투쟁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는 너무 다릅니다. 믿음이 없는 자에게 수많은 표적을 보여주어도 이들은 거부합니다. 자기 뜻과 기준에 반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세요? 주님의 말씀이 내가 다가와 믿어지나요? 아니면 말씀이 자꾸 내 마음에 튀겨져 나가나요? 만약에 튀겨져 나간다면 내 마음이 사악한 뭐가 있음을 뜻합니다. 이는 무서운 얘기입니다. 이를 제거하지 않으면 믿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나의 주로 믿기가 힘들다는 뜻입니다. 이런 자는 계속해서 예수님께 다가와 묻을 겁니다. “예수님. 나와 함께 계시나요”라고 물을 겁니다. 이미 내 마음은 다른 어떤 것들에 취해 있으면서 말입니다.

 

39절 그러자 유대인들이 또다시 예수를 붙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서 다른 데로 피하셨다.

유대인은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종교 생활을 하는 자일까요? 겉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하나님이 안 계십니다. 하나님이 없는 자신끼리 종교 생활만 합니다. 이들은 회당(교회)에 하나님이 없는 데, 이곳에 모여서 무엇을 하는가요?

 

요즘 많은 나라의 교회가 죽어갑니다. 교회에 예수님이 안 계십니다. 그곳에 다른 쾌락과 문란함이 채어집니다. 많은 교회가 죽어가고 있는데 왜 그럴까요? 원인은 딱 하나입니다. 교회에 예수님이 안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교회는 이미 죽은 교회입니다. 죽은 교회의 특징은 다른 문화가 교회에 들어옵니다. 온갖 세상의 것들이 이곳에서 펼쳐지고, 판치고 있습니다.

 

교회는 교회다워야 합니다. 예수님이 계신 교회는 세상의 문화와 세상의 경제가 들어와서 말씀보다 앞서면 안 됩니다. 교회 안에서만이라도 세상의 것들이 말씀보다 앞서면 안 됩니다. 우리 보통 세상에 주로 있다가 일주일에 교회에 1~2번 갑니다. 이렇다 보니 세상의 것들이 더 익숙해서 교회 안에서도 세상의 지식과 지혜에 대해 말을 많이 꺼냅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는 절대로 세상의 지식과 지혜에 관해 얘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시려면 교회 밖에서 하세요. 교회는 예수님이 계신 성전입니다.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 주님을 함께 만나는 장소입니다. 영적인 잠에서 깨면 주님의 음성이 들리고 주님의 양이 될 수 있습니다. 이곳에 세상의 얘기를 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제 경험상 매우 매우 위험한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세상의 얘기(지식과 정보)를 하시려면 교회 밖에서 하세요. 부탁입니다.

 

40절 그 후, 예수께서는 요단 강을 건너 세례 요한이 전에 세례를 주던 곳으로 가서, 거기에 머무르셨다.

 

41절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했다. “세례 요한은 어떤 표적도 행한 적이 없지만, 그가 이분을 두고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42절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합니다. 유대인은 솔직히 아니기를 더 원했습니다. 왜냐면 자신들의 일들에 대해 사사건건 반하는 말씀과 행동을 하셨기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유는 많은 기적과 놀라운 표적들을 보아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거는 했으면 좋겠는데,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함께 이들에게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선택은 하나님의 아들이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보다 예수님에 대한 증오와 미움이 더 컸습니다.

 

우리 삶도 그런 것 같아요. 남을 미워하고 증오하면 나에게  생명으로 주신 예수님의 십자가는 까맣게 잊고 맙니다. 나에게 준 예수님의 십자가는 멀리 떠나고 당장 나에게 눈엣가시인 자를 향해 분노가 쏟아집니다. 이때, 분노를 제어하지를 못하면 평생 씻지 못한 죄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도 살면서 정말로 싫은 사람이 있으시죠. 여러분도 예수님은 믿지만, 싫은 그 사람이 정말로 싫으시죠? 다 나의 죄 때문에 그렇습니다. 보통 나의 자존심과 나의 이득에 반하는 자를 싫어하는 나의 죄 때문에 발생하는 하나의 현상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분명히 하나는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게 준 사랑은 세상의 자존심도 아니요. 세상의 이득도 아니요. 오직 나만을 위해 주신 보혈의 피입니다. 뜨거운 피, 생명의 피, 나를 살리는 유일한 피입니다. 이를 깨닫지 않고 사시면 또 남을 향을 자기 뜻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돌을 듭니다. 진실로 진실로 말합니다. 남을 향해 돌을 들지 마세요.

 

주님을 진정으로 믿는 자는 주님의 음성을 못 듣지 못합니다. 단지 깨닫지 못할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더 간절히 듣기를 원해야 합니다. 주님의 음성이 세상의 음성에 묻혀 있지 않도록 더 귀를 쫑긋 세워 들어야 합니다. 분명 믿는 모든 여러분의 귀에 생생하게 예수님의 음성이 들릴 겁니다.

 

짧은 이야기 1

어느 주일, 평소처럼 아이들을 유치부에 보내고 아내와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날은 너무 피곤해서 예배 중에 졸고 말았습니다. 이건 저의 나쁜 습관인데, 피곤이 몰려오면 예배시간에 잠이 쏟아지곤 합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정말 피곤할 때 예배 중에 잠이 들면 1주일 동안 쌓인 피로가 사라져서 기분이 좋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이 자장가처럼 포근하고 따뜻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날도 예배를 마친 후 아내와 잠시 화장실에 들렀습니다. 그때 아내가 저에게 화장실에서 있었던 얘기를 말해줍니다. 한 여성도가 화장실에서 눈물을 흘리며 예배의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여성도는 눈물을 감추려 했지만, 계속 흘러나와 화장실에서 그만 아내에게 고백한 것이었습니다. 아내의 이야기를 들으며 제 마음 한구석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제 머릿속과 마음속에 전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큰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저를 스쳤습니다.

보통 내가 예배시간에 졸면 아내는 옆구리를 꾹꾹 찌릅니다. 하지만 안 그런 적도 있습니다. 그날은 너무 화가 나서 그렇습니다. 그날은 아내 얼굴의 표정이 너무 좋지 못합니다. 직접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내의 표정을 보고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음성도 그런 것 같습니다. 내가 직접 들을 수도 있지만 내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은 때때로 세상의 소리에 묻혀 내게 직접 들리지 않지만, 주님과 가까워지려는 간절한 마음이 있다면 주님의 음성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짧은 이야기 2

[사도행전 10장 9절~16절]

 

9절 이튿날 낮 12시쯤 그들이 여행을 계속하다가 욥바에 가까이 왔을 즈음 베드로는 지붕에 올라가 기도하려던 참이었습니다.

10절 그는 배가 고파 뭔가 좀 먹었으면 했는데 음식이 준비되고 있는 동안 환상을 보게 됐습니다.

11절 하늘이 열리고 큰 보자기 같은 것이 네 귀퉁이가 묶여 땅으로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12절 그 안에는 온갖 종류의 네 발 가진 짐승들과 땅에 기어다니는 것들과 공중의 새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13절 그때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하는 음성이 베드로에게 들렸습니다.

14절 베드로는 “말도 안 됩니다. 주님, 저는 불결하고 더러운 음식은 먹어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대꾸했습니다.

15절 그러자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불결하다고 하지 마라”는 음성이 두 번째로 들렸습니다.

16절 이런 일이 세 번 일어나더니 곧 그 보자기는 다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베드로는 정오쯤 지붕에 올라가 기도를 드립니다. 베드로가 배가 고파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데 그때 하늘에서 큰 보자기가 내려옵니다. 그 안에는 온갖 네 발 가진 짐승들과 기어가는 것들과 공중의 새들이 들어 있습니다. 율법에서 말하는 부정 해서 먹지 말아야 할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잡아먹으라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불결한 것들이라 먹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3번 말씀을 하십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자신 생각(율법사상)과 자신의 고집(전통)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거부하는 베드로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합니다. 대부분 성도가 주님의 음성을 못 듣는 것이 아닙니다. 내 뜻으로 “안 됩니다.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라며 고집을 부리고 있지 않은지 생각합니다.

 

대부분 순종을 힘들어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겁니다. 주님의 음성이 안 들리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에서 거부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주님의 음성은 다 들립니다. 하지만 내 마음에 거부하면 주님은 떠납니다. 주님의 음성을 거부하는 행위는 우리의 영혼이 죽고 사는 문제까지 올 수 있습니다. 무엇을 하든 주님의 음성이 들려야 내가 따를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너무 중요한 과정입니다. 내 마음에 세상의 아둔함은 이제 버리세요. 이것은 주님의 음성을 거부하는 도구들입니다. 이것들로 말미암아 주님과 멀어집니다. 주님은 큰 진리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는 자신이 이해가 잘 안 되더라도 깊게 생각을 합니다. 그 안에 뜻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짧은 이야기 3

[데살로니가전서 5장 14절~24절]

14절 형제들이여,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게으른 자들이 있거든 그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낙심한 자들에게는 위로와 격려를 베풀며, 연약한 자들을 도와주고, 모든 사람에 대해 많이 참으십시오.

15절 아무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 도리어 서로에게와 모든 사람에게 항상 선한 일을 베풀도록 하십시오.

16절 항상 기뻐하십시오.

17절 끊임없이 기도에 힘쓰십시오.

18절 어떤 처지에 놓여 있든, 모든 일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19절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

20절 예언을 멸시하지 마십시오.

21절 모든 일에 분별력을 갖고, 언제나 선한 일을 굳게 붙들도록 하십시오. 22절 악은 어떤 종류일지라도 흉내조차 내지 마십시오.

23절 평강의 하나님께서 친히 여러분을 온전히 거룩하게 해 주시고,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아무 흠 없이 완전하게 지켜주시기를 빕니다.

24절 여러분을 부르신 분은 신실하시므로, 그분께서 또한 반드시 그렇게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위 말씀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는 이런 삶을 삽니다. 만약 주변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는 자를 만나면 이 기준으로, 앞으로의 삶을 보시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우리의 삶이 점점 변해 갑니다. 하나하나 순종의 삶을 살게 됩니다.

 

[위 14절~15절 이해] 만약에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세요. 정말로 미우시죠. 충분히 주님도 잘 아십니다. 그러나 이 미움으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주님과 멀어지는 길입니다. 그래서 미움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그래도 너무 답답하면 주님께 고백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여러분 언제까지 이 미움으로 사실 겁니까? 언제까지 이 미움으로 내 평생을 보내실 겁니까? 이제 용서해 주세요. 그래야 내가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내가 살 수 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이(용서) 마음을 가져야 주님과 함께 사는 삶을 사실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겠습니다”라는 고백하는 하루가 되셨으면 합니다. 사랑하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