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양이 되고 싶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절~21절에 대해 QT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절~21절
오늘은 우리가 많이 들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목자이시고 우리는 양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은 목자이십니다. 믿는 우리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양이 맞는지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양처럼 내 마음이 목자이신 예수님의 목소리(말씀)에만 순종하는지? 예수님이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는지?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오는지? 아니면 안 들어오는지를 오늘 한 번 저와 함께 점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 혹시 내가 양보다는 강한 사자나 호랑이가 되고 싶지는 않은가요? 세상에 약자로 살기보다는 강자로 살기를 원하지는 않으세요?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세상에 짓밟히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입니다. 세상의 약한 자는 늘 외부의 침입을 잘 받고요. 이 충격으로 많이 쓰러집니다. 약자로 산다는 것은 너무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래서 강자의 삶을 찾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예수님은 양의 특징으로 “5절 양들은 절대로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분명 세상을 이기는 지혜도 함께 주셨습니다. 우리가 남에게 당하고 힘들어하는 이유는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세상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늘 좋게 보이는 것을 찾아다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리 와 늑대에게 당하는 겁니다. 오직 예수님만 따른다면 절대로 이런 이리 와 늑대에게 당하지 않습니다. 약자의 문제가 아니고 어리석음의 문제입니다. 강자라고 해서 속고 당하지 않을까요? 아니요. 어리석으면 강자도 당합니다.
1절 “내가 진정으로 여러분에게 밝히 말하겠습니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담을 넘어 들어가는 사람은 누구나 도둑이요 강도입니다.
문이 있는데 울타리를 넘어서 들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울타리를 넘는 자는 늑대나 이리들이 양을 잡아먹기 위해 하는 행동입니다. 주인은 문을 통해서만 울타리 안으로 들어갑니다. 문지기는 이 문을 열어주고 닫아줍니다. 주인이 양을 안정하게 돌보기 위해서입니다.
2절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양들을 돌보는 목자입니다.
그래서 문의 주인이 양의 목자가 되는 겁니다.
3절 문지기는 목자를 위해 문을 열어주고,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면서, 밖으로 데리고 나갑니다.
주인은 많은 양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십니다. 양 하나하나가 목자에게 너무 귀하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목자만 보고 순종하는 양들을 지키려고 목자는 밤낮으로 돌봐줍니다.
4절 양들이 모두 나오면, 목자는 앞장서서 걷고, 양들은 목자를 뒤따라갑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양들이 울타리 안에서 나오면 목자는 이들 양을 몰고 앞장섭니다. 주인이 가는 곳으로 양은 순종하며 따라갑니다. 그 길이 어느 곳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양들이 아는 거는 딱 하나, 주인이 내게 가장 좋은 곳(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 가운데)으로 인도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5절 양들은 절대로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낯선 음성이 들리면, 오히려 양들은 피하여 달아납니다.” 양들은 절대로 낯선 사람을 따르지 않습니다. 도리어 이들을 피합니다. 오직 주인만 바라보고 따릅니다. 낯선 사람이 좋은 것으로 유혹해도 따르지 않습니다. 주인만이 나의 가장 안전한 곳이라 믿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6절 예수께서 이처럼 비유로 말씀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말뜻을 깨닫지 못했다.
7절 예수께서 다시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내가 진정으로 여러분에게 밝히 말합니다. 나는 양의 문입니다.
예수님은 양의 문이라고 하십니다. 양의 문을 통해서만 들어가고 나온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의 양이 되었다면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을 하거나 특히 중요한 결정을 하면 예수님의 문을 통해 여쭤보고 따라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인도를 따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곧 우리의 순종을 말씀하십니다.
사실 저와 더불어 여러분은 이렇게 예수님 안에서 양처럼 사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느 이는 자유가 없다고 투덜거릴 거고, 어느 이는 숨 막혀서 못 산다고 불평할 겁니다. 나의 고집과 쾌락이 나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양보다는 강한 사자와 호랑이가 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남에게 약하거나 추하게 보이기 싫은 내 마음의 아둔함이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8절 나보다 먼저 온 사람들은 모두 도둑이요 강도입니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전 사람을 전부 도둑과 강도라고 표현합니다. 이전 사람 중에 철학과 문화에 뛰어난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이런 거친 표현까지 쓰셨을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모두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만이 참이라 그렇습니다. 지금은 당장 이해가 안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천국의 문에 들어서면 알 수 있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지혜는 썩어서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영원토록 우리에게 함께하십니다.
예를 들면, “민심(民心)은 천심(天心)이다.”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서경(書經)에 나오는 이야기인데요. 백성의 뜻이 곧, 하늘의 뜻이니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이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좋은 뜻이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을 사는 우리에게 정말 민심이 천심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보면 민심도 대중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조정되고 변화합니다. 사람의 지혜는 영원한 정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지식은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무리 좋은 사상과 아무리 좋은 교훈이 있더라도 이 모든 것이 주님의 말씀보다 앞서면 절대로 안 됩니다. 이런 어리석은 행위는 우리가 천국 문을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를 잃을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믿는 우리는 천국을 꿈꾸며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세상의 것만 찾는 자는 못 들어간다고 예수님은 간접적으로 말씀하신 겁니다.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있을까요? 이보다 더 나쁜 것이 있을까요? 예수님의 문으로 들어갈 기회를 어느 철학사상이나 다른 종교사상으로 잃었다면 너무 슬픈 일이 아닐까요.
천국에 들어가는, 길은 유일하게 예수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다른 곳에서 찾으시면 어리석습니다. 우리의 죄를 깨닫고 우리의 죄에 대해 속죄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9절 나는 양의 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 문으로 들어오면 구원을 얻고, 또 문을 드나들면서 좋은 풀을 얻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문이라는 것을 정확히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 문에는 구원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문에는 좋은 풀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영혼을 양식이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문은 예수님이십니다.
10절 도둑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파괴하기 위해 옵니다. 하지만 나는 양들에게 생명을 주고, 또 그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기 위해 왔습니다.
내 삶의 아둔함이 지배하면 도둑이 죽이고 파괴하려 내게 찾아옵니다. 이는 마귀를 뜻합니다. 마귀는 우리 삶에 실제 존재합니다. 우리의 삶과 영혼을 항상 죽이려고 주변을 돌고 있습니다. 마귀는 믿는 우리에게 겁을 주려고 사람이 만든 얘기가 아닙니다. 마귀는 우리 주변에 실제 살아있습니다. 그리고 믿는 우리를 늘 주시합니다.
믿는 우리는 주님 안에서 행복하고 잘되기를 누구나 원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요? 늘 넘어지고 아프고 상처를 받고 이렇게 살지 않으세요? 왜 현실은 좌절과 실패와 낙심과 고난이 많은가요? 그것은 시시때때로 우리 주변에서 우리의 약한 부분을 공격하는 마귀가 있기에 그렇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마귀가 찾아왔습니다. 다윗이 왕일 때 마귀가 찾아왔습니다. 베드로에게, 가룟 유다에게도 마귀가 찾아왔습니다. 마귀는 늘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약할 때를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을 파괴하려 준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진정으로 이를 알아야 합니다. 마귀가 있다는 사실을 못 느끼는 분은 정말로 하루하루를 위험하게 사는 겁니다.
정말로 우리가 주님의 양으로 살면 생명(구원)도 없고 풍성한 양식(꼴)도 얻는 삶을 삽니다. 우리가 인생의 성공의 유일한 문?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문으로 들어오세요.
11절 또 나는 선한 목자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양의 심정으로 믿어야 합니다. 오직 목자만 따라야 하는 심정으로 믿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못난 나를 위해 피를 흘려 주신 분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요?
12절 삯꾼은 목자가 아닙니다. 또 양들도 자기의 것이 아니므로,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혼자 달아납니다. 그렇게 되면 이리가 양들을 공격하여, 양들을 흩어 버립니다.
13절 삯꾼이 달아나는 것은, 그는 삯꾼이므로 양들을 진심으로 아끼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삯꾼을 조심해야 합니다. 삯꾼은 우리를 이용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용할 가치가 없으면 버리고 달아납니다. 삯꾼은 진정으로 여러분을 사랑하지도 않고 바른 곳으로 인도하지도 않습니다. 단지 여러분을 자신이 사용할 도구로만 생각합니다.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도구 말입니다.
14절 나는 선한 목자입니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압니다.
주님은 우리를 너무 잘 아십니다. 우리도 주님을 압니다. 서로 이용하는 관계가 아닌 진정으로 이름을 부르며 섬기는 관계이십니다. 주님은 나의 아픔을 진정으로 아파하십니다. 나의 연약함을 보호하십니다.
15절 그것은 마치 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조차도 내어놓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처럼 예수님은 우리와 관계를 맺으려고 하십니다. 서로 깊은 관계를 갖고자 하십니다. 이 관계는 목숨조차 아끼지 않은 진정한 사랑의 관계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이권이나 이득의 관계가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관계입니다.
16절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살고 있지 않은 다른 양들도 있습니다. 그 양들 또한 데려와야 합니다. 그들 역시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무리 양 떼가 되어, 한 목자 아래 있게 될 것입니다.
비록 현재는 울타리 안에 없지만, 그 너머로 예수님을 아는 자들은 다 예수님의 양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원하는 선한 양이됩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힘이 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양의 기준이 오직 유대인만이 아닌 예수님을 믿는 자(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지금은 울타리 안에 없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예수님의 양이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만이 목자이신 예수님의 양이 됩니다.
17절 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까닭은, 내가 내 목숨을 기꺼이 내어놓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기꺼이 목숨을 내어놓는 자는 오히려 목숨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면서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그렇게 진정으로 하나님께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어린 양이 되어야 예수님이 목자이심을 믿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푸른 목장으로 인도하시든 때론 거친 들판에 인도하시든 그냥 양처럼 순종하면 따라야 합니다.
양으로 산다는 것은 처음에는 어렵고 힘든 삶입니다. 늘 주님을 구하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매일 손해 보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양같이 살기는 정말 힘듭니다. 하지만 나의 과거를 돌이켜 보면 주님을 믿었던 것이 “나를 살렸구나”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세상의 많은 풍파와 어려움 가운데에서 주님은 늘 곁에서 나와 함께해 주셨습니다. 또 세상의 유혹과 속임수에도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부모님이 자녀에게 율법과 사랑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말씀 안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울타리를 벗어나면 늑대와 이리는 양을 향해 잡아먹을 기회를 찾고 있으므로 그렇습니다. 주님을 떠난 양은 이런 늑대나 이리의 밥이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우리를 늘 주시하며 유혹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말씀에 벗어난 삶은 끔찍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중에 체험을 통해서 아실 겁니다.
18절 아무도 내게서 내 목숨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나는 내가 스스로 원해서 내 목숨을 바칠 뿐입니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리도 있고, 다시 얻을 권리도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그런 권리를 내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겉으로 보이기는 유대인과 로마 군인들에게 잡혀 죽었지만, 이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려고 자신이 원했던 길입니다.
19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자, 유대인들 사이에 다시 의견이 분분해졌다.
20절 어떤 이들은 말했다. “저자는 귀신이 들렸거나 미친 것이 분명하오. 어째서 그런 자의 말을 듣고 있소?”
21절 또 어떤 이들은 말하길 “이런 말은 귀신 들린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오. 생각해 보시오. 귀신이 어떻게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단 말이오?” 하였다.
이사야 53장 6절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양이 "고집이 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로 몽골 사람들이 양을 길러 보면 아는 사실인데요. 양은 상당히 고집도 세고, 어떤 길을 가면 꼭 그 길만 가고, 풀을 뜯어 먹으면 한 자리에 움직이지 않고 뜯어먹어 뿌리까지 다 갉아먹어서 그 주변이 완전히 황폐하게 만드는 고집이 엄청나게 센 동물이 양입니다. 또 양은 시력도 좋지 못하고 냄새도 잘 맡지 못합니다. 그래서 골짜기 잘 빠지고 합니다.
우리의 모습이 이런 양 같습니다. 우리의 어릴 때를 보면 얼마나 자존심이 강하고 고집이 셌나요. 자기 생각이 늘 옳다고 하면서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지 않았나요? 그리고 양처럼 영적인 시력과 냄새도 좋지 못하여 잘못된 길로 빠지적도 있지 않나요? 우리가 양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양은 이런 고집이 있지만, 주인만 따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합니다. 양은 고집도 있지만, 이 고집보다 순종이 더 앞섭니다. 우리도 각자 고집은 있지만 이 고집보다 우선적으로 주님께 양처럼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살고 우리 주변이 삽니다.
예수님은 왜 이런 양을 우리와 비교했을까요? 양의 특징은 4가지 입니다.
1. 양은 미련하고
2. 양은 약하고
3. 양은 혼자서 살 수 없는 존재
4. 하지만 양은 목자만 붙잡고 따라가는 존재입니다. 그래야만 사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4번 목자만 붙잡고 따라가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4번 예수님만 바라볼 수 있을까요? 세상 것만 좋아하고 거창한 삶을 찾는 자는 절대로 예수님을 따르지도 못하고 또 예수님이 말하는 양이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현재까지는 약한 양으로 살기를 거부했다면 지금이라도 바꿔야 합니다.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양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오늘 하루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내 삶이 지금까지 어떠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아직도 사실 예수님만 믿고 순종하는 양처럼 살기에는 많은 두려움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저와 여러분이, 결단을 해야 합니다. 여기서 진짜 우리가 양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선택은 여러분이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선택의 결과는 매우 다른 결과를 초래합니다. 다시 말합니다. 천국의 문을 선택할지, 지옥의 문을 선택할지 지금 결정하세요.
매 순간 주님의 말씀에 기울려야 합니다. 내 맘이 다른 곳을 떠나지 못하도록 이를 지켜야 합니다. 내 맘이 주님 안에서 매일 뜨거워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양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매일 육신의 욕구가 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다스일 수 있습니다.
짧은 이야기 1
젊은 어부가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어요. 그런데 해초가 많아 고기를 잡는 데 방해가 되었습니다. 그는 화가 나서 불평했어요. “독한 약을 써서 해초를 없애버려야겠다.” 그때, 늙은 어부가 말했어요. “해초가 없어지면 물고기의 먹이가 없어지고, 먹이가 없으면 물고기도 없어진다.” 우리도 장애물이 없어지면 행복할 것이라고 믿지만, 사실 장애물이 사라지면 이를 극복하려던 의욕도 사라지게 됩니다. 오리는 알껍데기를 깨는 고통을 겪어야만 살아갈 힘을 얻어요. 누군가 그 과정을 도와주면 오리는 금방 죽고 맙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련이 있어야 삶이 윤기 나고 생동감 있게 됩니다. 우리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늘 작은 일에 짜증을 내며, 실패하면 원망을 합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내 삶을 지탱하는 연단입니다. 하나님이 뜻하는, 내 삶의 계획은 우리가 쉽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내게 이뤄지는 모든 것들이, 순간 힘들고 바로 외면하고 싶지만 이조차도 주님이 주신 내 삶의 일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양이되어야 합니다. 순종하는 양 말입니다. 처음에는 바보 같은 삶으로 세상에 비췰 수 있지만, 나중에 보면 가장 좋은 선택의 길임을 깨닫게 될 겁니다.
짧은 이야기 2
미국 버지니아에 존 영이라는 흑인 농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존 영 부부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 무식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신앙생활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하나님이 지켜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부부는 자녀들에게 '이 집의 뿌리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말을 항상 외우게 했습니다. 그 결과, 존 영의 자녀들은 누구 한 명도 낙오하지 않고 모두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자녀 중에는 코넬대학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은 사람, 교사, 간호사, 음악가 등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자녀에게 제일 좋은 선물 주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자녀가 사 달라고 하면 나쁘지 않거나 비싸지 않으면 웬만하면 다 사 줍니다. 때론 자녀의 장래를 걱정하며 좋은 교육을 하기 위해 비싼 영재 학원도 보내고, 아직 어린아이에게 원어민 영어유치원도 보냅니다. 자녀가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세상을 사는 지식입니다. 물론 이런 아이는 다른 아이보다 교육 수준은 높을 수 있지만, 삶의 본질은 이런 교육으로 채울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들에 게도 영혼이 있습니다. 이 영혼이 바로 서야 거친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단지 좋은 교육만 받는다고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뉴스를 보면 좋은 대학을 나와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좋은 대학은 좋은 성품이 아닙니다.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며 주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만이 주님 안에 좋은 성품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목자이신 예수님. 우리 이름을 부르시고 앞서 행하시며 날마다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 가운데 인도해 주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양이 되고 싶습니다.” 고백하는 하루가 되셨으면 합니다. 사랑하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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