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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예수님이 나귀 타시고 내 마음에 입성하십니다. 요한복음 12장 12절~19절

by 성경큐티 2024. 9. 30.

예수님이 나귀 타시고 내 마음에 입성하십니다. 요한복음 12장 12절~19절에 대해 QT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나귀 타시고 내 마음에 입성하십니다. 요한복음 12장 12절~19절
예수님이 나귀 타시고 내 마음에 입성하십니다. 요한복음 12장 12절~19절

 

 

요한복음 12장 12절~19절

12절 다음날,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다는 소식이 온 성안에 전해졌다. 그러자 유월절을 지내려고 예루살렘에 올라왔던 수많은 사람이 그 말을 듣고,

 

13절 저마다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를 맞으러 나와 큰 소리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그분께 복이 있기를! 이스라엘의 왕께 복이 있기를!” 하고 외쳤다.

 

14절 예수께서는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는데,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과 같았다.

예수님은 나귀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작고 초라한 모습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늘 말씀하십니다. 겉으로 보이는 행실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늘 영혼의 말씀을 자주 하십니다. 누가복음 11장 39절~40절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씻는다. 그러나 그 속에는 욕심과 악한 것이 가득 차 있다. 어리석은 사람들아, 겉을 만드신 분이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속에 있는 것으로 자비를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해질 것이다.”라고 음식을 하기 전에 손 씻는 거에 대해 말씀을 하셨습니다. 속이 욕심과 악한 것으로 썩어 있는데, 겉의 화려함의 도구로 사용하여 잠시 자신을 가린다고 합시다. 하지만 잠시일뿐 내부에서 썩은 독은 언젠가는 밖으로 뿜어내어 다른 이들을 상처를 주거나 유혹하는 악한 역할을 할 것입니다.

 

15절 곧 “시온의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왕께서 오신다. 그분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라는 구약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스가랴 9장 9절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하라!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환호성을 질러라! 보라, 너희 왕께서 너희에게로 오시니, 그분은 공의로우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시다. 진실로 그분은 온유하고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고 오시니, 어린 나귀 곧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라는 구약 예언이 이뤄졌습니다. 구약에 분명히 왕이 말을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지 않고 나귀를 타고 오신다고 예언입니다. 그렇게 기다렸던 메시아가 오신 겁니다.

 

16절 처음에는 예수의 제자들조차도 이것을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후에야, 이 말씀이 예수에 관한 기록이라는 것과 또 사람들이 그분께 그렇게 대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기다렸던 메시아가 오셨는데 예수님과 가까이 한 제자들조차 구약의 예언이 이뤄지는 메시아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백성들의 환호성에, 이 순간을 즐겼을 겁니다. 수많은 사람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왕으로 맞이했으니 그 옆에 있는 자신들에겐 얼마나 큰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마치 자신들도 왕의 직속 신하처럼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 길을 걸었을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너무나 중요해서 말씀을 드리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상상을 합니다. 그 상상이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상상을 늘 그립니다. 그리고 주님과 교제할 때도 이런 정의를 내세우며 주님께 다가갑니다. 물론 우리가 그리는 정의는 국가적이거나 사회적이거나 도덕적으로 문제가 전혀 없습니다. 정의는 우리가 살아오면서 배우고 읽힌 관습과 도덕으로 만들어져 있기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이 하나님의 공의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주 전체를 다스릴 때 정의로 다스리지 않습니다. 공의로 다스립니다. 조금 어려울 수 있지만 쉽게 설명하면 하나님은 공의를 위해서 악한 자를 사용하시어 우리의 악을 치십니다. 꼭 선한 자만을 쓰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깊고 넓습니다. 우리가 이해하기 힘듭니다. 우리는 아둔하고 어리석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자신이 부유하게 되면 삶이 안정하다고 생각합니까? 나의 주변에는 이리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늘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구로 이리들을 쓰실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아십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원하는 것도 아십니다. 힘 있는 왕으로 와서 악한 자를 무수고 약한 백성을 돌봐는 주는 힘 있는 왕을 원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그리고 로마제국을 부수고 이들에게서 벗어나게 하는 힘 있는 왕을 원한다는 거를 아십니다. 다 인간의 상상입니다. 유대 백성들의 정의입니다. 만약에 그런 이유로 오셨다면 구지 예수님이 이 땅에 안 오셔도 됩니다. 하나님이 노아의 방주처럼 노아 한 명을 세우고 홍수나 불덩이로 이 땅을 다 치시면 되는 문제입니다.

 

17절 예수께서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그를 살리셨을 때, 거기 있었던 사람들은 자기들이 본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퍼뜨렸다.

당시에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남을 본 사람들이 여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증언하며 알립니다. 죽은 자도 살리시는 기적을 보이신 분이라고 알립니다. 삶과 죽음의 분리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인간의 맘으로 절대로 이해가 되지 않는 기적 중에 놀라운 표적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 백성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이들로 왜 변했을까요? 우리는 살면서 기적을 봐도 그때뿐인 것 같아요. 우리는 살면서 주님의 은혜를 계속 기억하지 못합니다. 부모님이 나에게 주신 사랑을 잊고 사는 것처럼 말입니다.

 

18절 그렇게 많은 군중이 몰려나와 예수를 열렬히 환영하게 된 것도, 예수께서 행하신 그처럼 놀라운 기적에 관해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환영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기적(표적) 때문에 이뤄진 행위들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 표적만 보여주시면 무조건 주님을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는 주님이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대부분 표적만 따라 사는 삶은 절대로 믿음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19절 그런 광경을 보고,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말했다. “보시오, 이제 우리가 설 자리는 없소. 온 세상이 다 그를 따라가고 있잖소!”

19절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이유가 밟혀집니다. 그들은 자리를 보존하기 위해 자신의 구세주를 죽이려고 합니다. 자리 보존이 너무 무서운 결과를 만듭니다. 이 땅에 머물면서 만들어진 자리, 마치 그 자리가 없으면 수입이 없어지고 수입이 없어지면 빵을 못 삽니다. 빵이 없으면 우리는 굶어 죽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자리 때문에 우리는 구세주를 외면하고 죽이려고 합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이유가 뭘까요? 우리는 왜 그렇게 자리를 보존하려고 할까요? 그리고 빵과 떡을 주는 그 자리를 위해 그렇게 목숨을 걸까요? 세상의 사탄은 우리를 그렇게 만듭니다. 빵을 줄게 내게 충성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충성하는 자에게는 빵과 보너스로 떡을 더 줍니다. 그리고 충성하지 않거나 게으른 자에게는 빵을 아주 조금 줍니다. 우리는 빵을 더 받기 위해 우리는 그 자리에 충성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우리는 먹고사는 문제에 항상 부딪힙니다.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땅에서 먹고사는 문제가 없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이 땅에 온전히 주님을 믿을 수 있을까요? 저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은혜로 많은 열매를 주었습니다. 당시 먹고사는 문제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탄은 또 다른 유혹으로 죄에 빠지게 만듭니다. 인간의 연약한 부분을 건드리는 겁니다. 지금 이 시대는 먹고사는 문제가 우리의 연약한 부분입니다. 사탄은 이 부분을 건드려 우리를 주님과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먹고사는 문제는 주님과 멀어지는 하는 사탄의 계략으로 자주 사용합니다.

 

문제는 우리의 본성입니다. 주님과 멀어지는 문제가 단지 먹고 살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본성의 문제로 접근하시는 게 맞을 겁니다. 본성이 바로 서지 않으면 이런 문제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합니다.

 

누가복음 19장 40절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저들이 잠잠하면, 길가의 돌들이 소리칠 것이오.”

백성들은 이렇게 거대하게 예수님의 입성을 맞이하였으나 결국 예수님을 죽이려는 행위를 합니다. 우리의 머리로 이해가 쉽게 알 될 정도로 너무 이분법적인 행위입니다. 이런 행위는 예수님의 표적으로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의 표적으로 잠시의 만족은 채웠지만, 아직 예수님이 자신의 만족을 100% 다 채우기에는 부족함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본문 마지막(19절)에 바리새인들조차도 예수님을 인정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왕이나 메시아에게 받을 찬양을 예수가 받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표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침묵하여도 돌들이 찬양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예배하는 곳에는 반드시 찬양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온몸을 다해 주님과의 만남을 기뻐해야 합니다. 예배 시간에 무거운 얼굴로 침묵하는 분들도 많은데요. 예수님을 만나는 기쁜 장소에서 이런 모습은 예수님이 어떻게 생각할까요?

 

다윗이 하나님의 궤 앞에서 춤을 춥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빼앗겼던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탈환해 왔을 때, 다윗 왕이 기쁨에 겨워 ‘옷이 벗겨질 정도’로 춤을 췄고, 그것을 본 그의 아내 미갈이 그를 조롱하다 하나님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는 큰 벌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너무 좋아 춤을 추는 행위와 방언으로 기도하는 행위를 보고 절대로 조롱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이런 행위는 주님께 반응하는 행위이며 주님이 매우 좋아하십니다.

 

예배 시간에 미지근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이런 사람을 차분하다고 생각하는데요. 하지만 예수님은 싫어하십니다. 이런 사람을 향해 “돌들이 찬양할 거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맞이하는 우리의 기분이 어떠해야 할까요? 진심으로 흥분하고 긴장하고 너무 기쁜 마음으로 찬양이 먼저 나와야 합니다. 오늘 예배의 은혜를 받으려면 내 마음에 먼저 이런 십자가의 은혜가 열려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십자가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의 기적만 바라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죽는 그 날을 기억하며, 세상의 것만 바라지 않습니다. 그래야 십자가의 영광을 바라보고 붙잡습니다. 천국에 갈 생각만 하면 저절로 찬양이 나옵니다. 천국은 아무나 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자만이 믿음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랑을 아는 사람은 오직 십자가의 사랑만 붙잡고 삽니다. 세상의 기적 따위는 그다음의 문제입니다.

 

또 고난이 오면 우리는 불평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대신 “주님께서 나에게 이런 고난(연단)을 통해 나를 단련시키는구나”라고 고백하는 은혜를 받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이들은 불평하기보다는 찬양하였습니다. 내 안에 주님이 함께 계시면 나의 환경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너무 기쁜 날입니다. 예수님과 만나는 날입니다. 우리가 언젠가는 예수님께 가야 하므로 그렇습니다. 세상의 미련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날을 위해 하루하루를 사는 겁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사는 겁니다.

 

짧은 이야기 1

미국의 어느 신문 1면에 13살 난 두 소년에 관한 기사가 나란히 실렸다고 합니다. 한 소년은 그 지방의 철자 맞추기 대회에서 우승하여 전국 결승대회에 출전한다는 기사였고, 다른 한 소년은 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되어 기소되었다는 기사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두 소년이 같은 부모 밑에 태어난 쌍둥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한 아이는 부모의 자랑거리가 되어 부모를 기쁘게 하였으나 다른 아이는 부모의 걱정거리가 되어 부모의 마음에 못을 박았습니다. 같은 부모를 두고 똑같은 환경에서 자라난 이 두 소년의 인생이 이처럼 상반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요즘 부모님은 아이들의 성공을 위해 희생을 합니다. 좋은 환경을 마련해주고 힘들더라도 좋은 곳의 학원에 보냅니다. 이런 노력으로 아이들은 똑똑하게 큽니다. 하지만 똑똑한 것이 세상을 살면서 전부는 아닙니다. 똑똑한 지식을 엉뚱한 곳에 사용하면 독이 됩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먼저 세상의 지식보다는 하나님의 지혜를 먼저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같은 교육을 받았다고 해도 나 자신이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절대로 똑바른 길로 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같은 교회에서 같은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성도 한 분, 한 분이 다른 것이 예배가 나 삶에 전부라고 믿는 성도와 그냥 습관적으로 하는 성도와는 예배의 본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짧은 이야기 2

프란체스코의 일화입니다. 그가 고향집 우물에서 물 깃은 하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인은 큰 물통을 내려 물을 가득히 담고서 끌어올릴 때, 항상 조그마한 나무토막 하라를 물통 안에 던져 넣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프란체스코가 하인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인은 “물을 퍼 올릴 때 나무토막을 물통 안에 넣으면 물이 요동치지 않게 되어 물이 밖으로 흘러넘치는 것을 최대한 막을 수 있거든요”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보았나요. 하지만 내 마음에 남아 있는 말씀은 지금 있기나 하나요? 대부분 물이 흘러 어디론가 떠나갑니다. 이때 나뭇가지 하나를 붙잡는 심정으로 십자가를 잡아보세요. 세상은 많은 풍파로 요동치지만, 우리가 잡은 이 십자가는 그 위에서 우리의 중심을 잡아 줄 겁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이 나귀 타시고 내 마음에 입성하십니다”라고 “호산나” 외치는 하루가 되셨으면 합니다. 사랑하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