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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요한복음 8장 1절~11절

by 성경큐티 2024. 9. 23.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요한복음 8장 1절~11절에 대해 큐티(QT)하겠습니다.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요한복음 8장 1절~11절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요한복음 8장 1절~11절

 

 

 

 

요한복음 8장 1절~11절

 

오늘 말씀은, 간음한 여인이 현장에서 걸려서 예수님께 데려오는 사건입니다.

 

매일 QT를 하시면 좋은 점은 말씀 안에 내가 들어가서 살 수 있다는 겁니다. 내가 다윗의 성경 구절을 읽고 큐티하다보면 내가 다윗이 되어있는 모습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다윗의 선한 고백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직접 느껴봅니다. 다니엘의 성경 구절을 읽으면 이번에는 내가 다니엘이 되어있습니다. 다니엘이 되어 하나님만 섬깁니다. 그러다 모함으로 사자 굴에 던져지는 아픔을 함께 느껴봅니다. 그러다 하나님의 도우심에 다니엘이 기적적으로 살아났을 때를 상상해 봅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죽음에서 벗어났다는 상상을 해 봅니다. 너무 흥분되지 않습니까? 다리오 왕이 사자 굴에 아침 일찍 와서, 말합니다. “다니엘. 너희 하나님께서 사자들로부터 구해주셨느냐?” 조금 뒤에 다니엘이 말합니다. “왕이시여 만수무강하십시오. 간밤에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셔서 사자들의 입을 막아주셨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너무 큰 희열감을 느낍니다. 이렇게 성경의 인물들을 읽고 묵도하고 큐티하다 보면 내 마음이 성경 말씀 들어가 3인칭이 아닌 1인칭이 됩니다. 그때 내 마음이 뜨겁게 타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매일 똑같은 하루 삶이 점점 변해감을 느낍니다. 이런 경험을 모두가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큐티가 너무 좋아서 서론이 많이 길었네요. 같이 주님 안에 큰 기쁨을 느꼈으면 합니다.

 

1절 예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2절 다음날 이른 아침, 예수께서 다시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오셨다. 사람들이 다시 주변에 모여들자, 예수께서는 자리에 앉아 그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 어느 장소든 상관하지 않으시고 모이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곳에서 가르치십니다.

 

3절 그때 율법 교사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한 여자를 데리고 와서, 사람들 앞에 세워놓은 후,

 

4절 예수께 물었다. “선생님, 이 여자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5절 모세의 율법을 보면, 이런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라고 되어 있는데, 선생님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한 여자가 간음하다가 잡혀 왔습니다. 당시 율법에 따르면 간음하다가 현장에 붙잡히면 돌로 쳐 죽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율법 교사와 바리새파 사람)은 이 여자를 이용하여 예수님의 죄를 만들려는 속셈으로 여자를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예수님은 ”늘 사랑하라, 용서하라 “라는 말씀을 자주 하십니다. 그래서 이 간음한 여자를 용서하면 율법 교사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세 율법을 어겼다고 예수님께 죄를 물을 것입니다. 반대로 간음한 여자를 돌로 쳐 죽이라고 말하면, 그동안 말씀하신 예수님의 용서가 잘못되었음을 스스로 증명하게 됩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게, 함정 만들어 빠트릴 속셈이었습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어떻게든 예수님의 죄를 만들어 죽이려 속셈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이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했습니다.

 

6절 그들이 이런 말을 한 것은, 예수께 올무를 놓아 그를 고소할 구실을 찾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하셨다.

여기에 모인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들의 악한 마음에 직접 글을 쓰십니다.

 

7절 그들이 계속 대답을 재촉하자, 예수께서 몸을 일으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여러분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지십시오.”

예수님은 몸을 일으키며 말씀하십니다.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잘 아십니다. 다 죄인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잠시 간음한 여자를 보면서 나 자신을 생각해 봅니다. 나도 당시 그 현장(자리)에 있다면, 간음한 여자를 향해 돌을 던질 수 있는지, 말입니다. 유대인들과 똑같은 행동을 하고 집으로 돌아갔을 겁니다. 반대로 나 자신도 살면서 작든, 크든 죄를 범합니다. 보이지 않은 겉과 속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증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붙잡고 살려달라고 매일 기도해야 합니다. 당시의 그 현장에 모인 유대인들은 돌을 던질 처지보다는 돌을 맞아야 할 처지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 다른 사람들이 나를 해하려고 할 때, 왜 그러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 해하는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이유가 분명 있습니다. 그냥 나만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죄를 짓고 매일 삽니다. 작든 크든 죄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일상의 모습입니다.

 

8절 그런 후, 예수께서는 다시 몸을 굽혀서, 땅바닥에 무엇인가를 더 쓰셨다.

 

9절 예수의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한 사람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나이 든 사람들부터 하나씩 빠져나가더니, 나중에는 예수와 그 여자만 남게 되었다. 그 여자는 거기 그대로 서 있었다.

율법 교사와 바리새파 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사람부터 하나씩 빠져나갑니다. 하나님이 보시는데 거짓으로 돌을 던질 수는 없기에 그런 행위를 합니다. 스스로 자신이 죄인임을 밝히는 행위입니다. 분명 예수님은 죄 없는 사람이 돌을 던지라고 하셨기에 돌을 못 던지는 이들(율법 학자 및 바리새파 사람들)은 죄인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돌아가는 겁니다.

 

우리는 남의 티끌은 보면서 자신의 들보를 보지 못합니다. 솔직히 나와 여러분도 그 자리에 있다면 돌을 못 던질 겁니다. 아무리 내 자신이 깨끗해도 속으로 지은 죄도 크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내가 돌을 맞아야 처지라 생각하는 것이 맞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너무 관대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자신의 값진 피로 용서해 주십니다. 이 사랑은 너무나 귀하고 값진 아가페 사랑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율법 교사와 바리새파 사람들과는 달라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들처럼 그냥 돌만 내려놓고 돌아가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 자리에서 바로 무릎 굽고 예수님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죄가 있다고 자신이 인정했다면 이를 그 자리에서 회계해야 합니다. 회계하지 않은 사람은 또다시 다른 사람을 향해 돌을 들고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자신도 죄인이면서 남의 죄를 행해 돌로 치려고 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쉽게 남의 행위를 보고 정죄하고 판단합니다. 이런 죄를 쉽게 범합니다. 눈물로 자신의 죄를 주님께 고백하고 회계해야 합니다. 그 단계까지 가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살고 죄의 울타리 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런 단계까지 못 가면 또 죄 속에 묻혀 살면서, 자신이 깨끗한 척, 가면을 쓰고 살아갈 겁니다. 오늘 큐티를 통해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회계하는 단계까지 나아가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예수님은 정말 놀랍습니다. 우리는 율법 학자나 바리새파처럼 사람을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는데, 예수님은 우리의 속을 꺼내서 논쟁의 진실을 말씀하십니다. 너무 놀랍지 않습니까?

 

10절 예수께서 몸을 일으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그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갔소? 당신을 정죄하던 사람들이 한 사람도 없소?”

 

11절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하고 그 여자가 대답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당신을 정죄하지 않겠소. 그러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시오.”

간음한 여인은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죽어야 할 죄를 지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거의 포기한 상태였는데, 모세 율법을 초월하여 예수님의 말씀으로 살았다는 것이, 너무 기적이라서, 감동하며 기뻐했을 겁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은혜로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직접 용서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용서받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늘 말씀하신 용서의 깊은 뜻이 이뤄집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죄인을 용서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원수까지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속죄함을 받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자,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의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한 달란트는 육천 데나리온이며 한 데나리온은 일꾼의 하루 품삯입니다. 일군의 품삯을 7만 원으로 잡으면 한 달란트는 4억 2천만 원이고, 일만 달란트는 4조 2천억 원입니다. 4조 원을 탕감받은 자가, 백 데나리온 7백만 원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예수님의 피로 주신 속죄함은 그렇게 큰 은혜입니다. 나의 평생에 지은 죄를 예수님의 피로 살리시는 값진 은혜입니다.

 

이런 속죄함을 받은 우리는 늘 겸손하게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남을 정죄할 때, 늘 주님의 피의 은혜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나에게 놀라운 사랑을 주셨는데, 왜 나는 다른 사람에게 돌(정죄)을 들어 던지려고 하는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내가 받은 사랑이 더 큰데 말입니다. 간음한 여인은 예전 삶을 벗어나 더 진실한 삶을 살 것입니다. 반대로 바리새인 사람들은 속죄에 빠져 살 겁니다. 이는 너무나 겉과 속이 다른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시오”입니다. 여인에게 죄를 용서하신 예수님은 분명하게 한 구절을 더 추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다시는 이런 죄를 짓지 마시오”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용서와 사랑을 주시는 우리의 구세주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를 믿고 죄를 이어간다면 예수님께서도 죄에 대한 벌을 내리실 수밖에 없습니다. 용서를 받았다면 바꿔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끝 구절을 꼭 생각하고 분명히 기억하며 오늘 하루도 사셨으면 합니다.

 

 

짧은 이야기 1

옥스퍼드 대학교의 교수와 학장을 지낸 존 오웬 박사는, 한때 냄비와 솥을 수선하는 불학 무식한 땜장이였던 존 번연이 런던을 방문할 때면 언제나 그를 찾아가서 그의 설교를 듣곤 했습니다. 어느 날, 찰스 왕이 오웰 박사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의 학식에 뭐가 모자라서 하필이면 그 천박한 존 번연이 설교하는 것을 들으러 가십니까?” 오웰 박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만약에 제가 그 땜장이가 가진 은사들을 가질 수만 있다면, 저는 기꺼이 저의 학식을 다 포기할 것입니다.” 오웰 박사의 존경을 받던, 그 무식한 땜장이 출신의 존 번연은 결국 감옥에서 후세에 길이 남는 고전 [철로 역전]을 완성했습니다.

 

성령을 받은 자는 다릅니다. 성령의 은사는 어떠한 세상의 것과 다른, 큰 은혜가 있습니다. 이는 주님이 주신 은혜이며 이는 아무나 얻을 수 없습니다. 진심으로 주님의 말씀으로 사는 자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나 받을 수 없다고 말한 겁니다. 자신의 학식이나 지식을 의존하지 마세요. 이런 것으로 성령이 내 안에 거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그대로 내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내 영혼이 삽니다. 

 

 

짧은 이야기 2

어느 마을에 거대한 참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그 나무는 마을 사람들의 자랑거리였습니다. 그것은 마을 사람들이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있었고, 또한 그들보다 오래 살아남을 것을 모두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찬 폭풍이 나무를 반으로 쪼개고 지나갔습니다. 그러자 나무의 썩은 속이 훤히 드러났습니다. 겉으로는 힘과 장수의 상징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병들어 죽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늘 겉모습만 보고 남을 정죄하고 판단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속은 볼 수가 없기에 그렇습니다. 그렇다 보니까. 늘 사람에 실망하고 또 사람에 속습니다. 인간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완전해지려고 노력하고 도전합니다. 그러려면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완전한 자신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짧은 이야기 3

두 개의 바다 슬픔의 땅, 팔레스타인에는 두 개의 바다가 있습니다. 하나는 갈릴리 해, 다른 하나는 사해입니다.

 

이 두 바다는 모두 요단강에서 물이 흘러들어오지만, 갈릴리 해는 물이 맑고 생명이 가득한 아름다운 바다입니다. 반면 사해는 염분이 너무 많아 아무 생물도 살 수 없는 죽음의 바다입니다.

 

왜 두 바다가 이렇게 다를까요? 요단강이나 토양, 기후 때문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다른 데에 있습니다.

 

갈릴리 해는 강물을 받아들이지만, 그것을 가두지 않고 흘려보냅니다. 한 방울이 들어오면 반드시 한 방울이 나갑니다. 주고받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반면 사해는 들어온 물을 절대 내보내지 않습니다. 들어온 물을 자신의 그것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일 뿐, 절대 내놓지 않습니다. 받기만 하고 주지 않는 것입니다.

 

생명의 바다와 죽음의 바다…. 주는 것과 받기만 하는 것의 차이…. 사람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우리는 갈릴리 해가 될 수도 있고, 사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4조 7천억을 탕감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1천만 원도 아깝다고 생각하여 베풀지 못합니다. 큰 사랑이 받았는데…. 나는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흘려보내지 못합니다. 그러면 썩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해”처럼 말입니다. 유대의 율법 학자나 바리새인 사람들은 하나님께 사랑은 받았지만, 이 사랑을 잊고 남을 정죄만 하려고 합니다. 결과는 육으로는 하나님과 가까울 수 있으나 영적으로는 하나님 없는 어리석은 인생을 살게 됩니다. 사해처럼 썩은 인생을 삽니다.

 

오늘 말씀처럼 나와 여러분은 죄인입니다. 그리고 속죄를 매일 짓고 삽니다. 하지만 주님의 값진 피로 우리의 죄를 날마다 지워주십니다. 그래서 나와 여러분은 오늘 하루도 살 수 있습니다. 죄인인 우리가 어떻게 남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남을 어찌 정죄하고 판단하겠습니까? 이 또한 죄의 모습입니다.

 

오늘부터 진심으로 "나의 죄를 회계합니다"라고 고백하세요. 그러면 분명 예수님은 나에게 다가와서 “나도 당신을 정죄하지 않겠소. 그러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시오”라고 말씀하실 겁니다.

 

오늘 하루 “나는 돌에 맞는 자리에 선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고 회계하면서 하루를 보내셨으면 합니다. 사랑하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