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죽고 예수님만 사십니다. 요한복음 11장 45절~53절에 대해 QT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1장 45절~53절
45절 마리아에게 문상을 왔다가 예수께서 행하신 이 일을 본 유대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마침내 예수를 믿게 되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셨을 때,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매우 뜨거웠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겠다고 모였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신의 권위가 위태로워질까 걱정했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킨다면, 로마 군인들이 이를 강제로 진압할 수도 있었고, 그러면 유대인들이 큰 위험에 처할 수 있었습니다.
46절 그러나 그들 중에는 바리새파 사람들에게로 가서,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일러바친 사람도 있었다.
47절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 일을 논의하기 위해 공회를 소집했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소? 그자가 별별 이적들을 다 행하고 있으니 말이오.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본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 일로 인해 파장될 것을 걱정하며 공회의 소집을 요청했습니다.
48절 우리가 그자를 이대로 내버려 두면 아마도 온 백성이 그를 따르게 될 것이고, 그리 되면 분명 로마 사람들이 쳐들어와서, 우리의 땅을 파괴하고 우리 민족을 짓밟을 것이오.”
49절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인 그 해의 대제사장 가야바가 말했다. “여러분들은 정말 그렇게도 모르겠소?
50절 백성들을 위해 이 한 사람을 죽게 해서, 민족 전체를 망하게 하지 않는 것이, 정녕 여러분들에게 유익이 되는 줄을 알지 못하는 것이오?”
대제사장 가야바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럼 간단하군요. 예수님만 죽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정말 무서운 발언입니다. 그는 사건의 문제를 없애기 위해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이라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은 나사로라는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셨지만, 그로 인해 자신은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51절 이 말은 가야바가 제멋대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 해의 대제사장으로서 가야바는, 예수께서 온 백성을 위해 죽게 될 것임을 예언한 것이다.
52절 즉, 예수께서는 유대 민족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그들 모두를 한데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해서 죽으실 것임을 예언한 것이다.
53절 그때부터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일 음모를 본격적으로 꾸미기 시작했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예수님을 죽이면 민족이 살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웁니다. 그런데 이 말이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가야바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말했지만, 하나님은 그 사건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이루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악한 사람의 말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나요?
가야바의 말에 대해 생각해보면, 예수님을 죽여서 민족을 살린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당시 유대민족은 로마의 지배 아래에서 많은 압박을 받았고, 로마는 유대 지역을 포함한 여러 지역을 정복하여 유대인들을 억압했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민족을 구하는 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는 어쩌면 인간적인 판단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단, 이 판단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아야 성립됩니다.
하지만 가야바가 어리석은 것은 예수님이 보여준 많은 표적들이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이 표적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가능한 표적들입니다. 이런 표적들에 대해서 가야바도 들고 봤잖아요. 그런데 왜 자신이 보고 들었던 진실을 감추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복종까지도 바라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사실만 인정하면 됩니다. 이게 바로 순종의 시작입니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이 유대 민족과 흩어진 자녀들을 한곳에 모으기 위해 죽으셨다고 말하며, 이는 하나님의 예언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죽음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부인하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아닌 주님의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처음에는 이 말이 무겁게 느껴질 수 있지만,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세상의 가치로 판단하던 시선이 주님의 사랑으로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왜 역사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역사와 우리의 자아가 지금도 부딪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자아가 이기면 하나님이 내 맘에 역사할 수 없습니다. 젊을 때는 욕망과 욕구의 자아가 얼마나 큽니까. 내가 붙잡아도 붙잡을 수 없을 만큼 큽니다. 하지만 세월이 해결해 주더라고요. 세월의 풍파를 맞으면 내 자아는 자연스레 약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때 자연스레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말이 내 마음에 울리기 시작합니다. 그때 내가 주님만 따른다는 맘이 생기고 순종을 배웁니다.
여러분 중 내 마음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으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내 마음은 약하고 어리석은데 이 좁은 곳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나는 의인도 아닌데 말입니다. 예수님이 계셨던 갈릴리 지방은 작은 소도시입니다. 이 지역은 변방 중의 변방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을 생각해 보세요. 정말 형편없는 제자들도 있잖아요. 그렇게 보면 지역이나 인품으로 예수님은 선택하지 않으세요. 예수님은 이 지역에서 이 못난 제자들을 선택해서 쓰셨습니다.
내 마음에 예수님이 없는 이유는 내 자아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강하면 예수님이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는 많은 것을 시도하지만, 예수님 안에서 자아를 죽이는 것은 잘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보다 한 사람의 헌신과 믿음을 원하십니다.
생각해 보세요. 나의 자아가 살면 우리 주변의 사람들은 매우 힘듭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다 자아가 있기에 그렇습니다. 자아가 충돌합니다. 하지만 나의 자아가 죽으면 주변의 사람들이 행복합니다. 나 하나의 순종으로 주변의 사람들이 편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자아가 살면 주님은 이 안으로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너무나 세서 그렇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되새기며, 혹시 내 자아가 너무 강해 예수님을 멀리하고 있지는 않은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죽으면 많은 사람들이 삽니다. 가정과 교회, 직장까지도 영향을 받습니다. 주변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본인만 모릅니다. 그래서 나는 죽고 예수님만 살면 됩니다.
짧은 이야기 1
아프리카에서는 매일 아침 ‘가잘’이라는 양이 눈을 뜹니다. 그 양은 오늘도 빠른 사자에게 잡히지 않으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고 결심해요. 반면, 사자는 매일 아침 눈을 뜨고는 오늘도 굶어 죽지 않기 위해 가장 느리고 어리석은 가잘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해요.
이 이야기는 그리스도인과 마귀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거예요. 그리스도인은 항상 경계해야 해요. 왜냐하면, 마귀는 아주 교묘하고 똑똑해서 방심하면 안 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항상 주의하고 조심해야 해요.
마귀의 속셈은 질투, 분쟁, 혐오, 증오, 미움, 분노 등 이런 것들을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치도 방심하면 이런 마음을 주어 상대방을 공격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죽고 예수가 살지 않으면 우리는 이런 마귀의 마음에 흔들리고 맙니다.
짧은 이야기 2
어느 날 스승이 제자에게 돌멩이를 하나 주면서 말했어요. “이 돌을 시장에 가서 팔려고 해보지만, 실제로는 팔지 마세요.” 제자는 스승의 말에 따라 시장에 가서 보자기를 펴고 돌멩이를 올려놓았어요.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그를 비웃었어요.
그때 한 노인이 다가와서 말했어요. “젊은이, 5,000원을 줄 테니 그 돌을 팔고 집에 가세요.” 하지만 제자는 팔지 않겠다고 했어요. 노인은 그 돌이 귀한 그것으로 생각하고 10,000원을 제안했어요. 그러자 사람들이 모여들어 흥정을 시작했어요. 돌의 값은 계속 올라갔고, 결국 100만 원까지 올라갔어요. 하지만 제자는 “저는 이 돌을 팔 수 없어요. 그냥 가격을 알아보러 나온 것뿐이에요.”라고 말하고 돌을 다시 보자기에 싸서 돌아갔어요.
제자가 돌아오자 스승이 말했어요. “이해했니? 사람들이 정하는 가치는 얼마나 헛된 것인지.”
우리는 세상이 만들어낸 가치에 속아 유혹당하기 쉽습니다. 사실, 우리는 집이 있고, 밥을 먹고, 옷을 입는 것으로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데, 더 큰 것들을 원하게 만들어 우리의 마음을 흔듭니다. 결국, 그렇게 많은 재산을 쌓고도 죽을 때는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다는 사실을 잊습니다.
경제학에서 희소성이라는 개념을 배우게 되는데,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이 귀하게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가치가 높아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내 삶에 실제로 어떤 도움이 될까요? 오히려 내 마음에 이런 잡다한 것들 대신 주님이 계신다면 훨씬 더 좋지 않을까요? 이 점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짧은 이야기 3
어린아이가 정원에서 아버지 곁에서 놀고 있었어요. 아이는 정원에 있는 큰 바위를 들어보려고 했지만, 바위가 너무 커서 혼자서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어요. 아이는 한참 동안 바위와 싸우다가 결국 포기하고 아버지에게 돌아왔어요.
그때 아버지가 말했어요. “너는 네 힘을 다 쓰지 않았구나.” 아이는 “아니에요, 저는 힘을 다 썼어요. 더 할 수 없어요.”라고 대답했어요. 그러자 아버지가 말했어요. “너는 나에게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잖니? 그게 너의 힘이란다. 내가 여기 있었는데도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으니, 너는 네 힘을 다 쓴 게 아니란다.”
보통 "최선을 다한다"는 말은 내가 스스로 힘을 다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건 결국 나 자신의 힘에 의존하게 되므로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변에 함께하는 사람들도 있고, 믿는 우리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특히 예수님께 기도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는 것은 앞으로 절대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아가 죽으면 그때 예수님이 우리에게 찾아와 함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오늘 하루는 “나는 죽고 예수님만 사십니다”라는 고백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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